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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ual Award

No Annual Award This Year

매해 연말이면 Annual Award를 선정했는데 “뭔가 하던 일을 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도 한번 쯤은 해 볼만한 일일 것 같아서 2019년은 Annual Award를 선정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지 않아도 시간에 관한 기억력이 나쁜데 2019년의 기억은 더더욱 희미해질 듯 싶다. 그런 점은 아쉽지만 사람이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으니까.

#심경의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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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rt of Wishing Well

인사의 기술

나는 십대 시절부터 “메리 크리스마스!”, “생일 축하합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등의 인사말이 줄곧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런 인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입을 다물고 있다가 결국은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얼버무리곤 했다.

그나마 몇 년 전, 우치다 타츠루의 글을 통해, 인사말이라고 하는 것은 언어적 표현 그 자체에는 원래 아무 의미가 없고, 단지 상대에게 좋은 일이 있기를 바란다는 제스쳐를 주고 받는 행위가 인류 공통의 의식(ritual)으로 자리잡은 것이라고 배운 덕분에 지금은 덜 어색한 마음으로 인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약간 불편함을 느끼는 인사말 중 하나는 “안부를 전해주세요”라는 표현. 통신과 여행이 쉽지 않았던 과거에는 전달자를 통하지 않으면 인사를 전할 방법이 달리 없었으므로 이런 간접 인사가 의미가 있었지만, 오늘날은 직접 안부를 묻는 것이 적어도 기술적으로는 어렵지 않으므로 이 표현의 맥락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만약 직접 마주하여 인사를 하기에는 약간 어색한, 아주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관계라면 중개자를 통한 인사가 가능할 수 있는 한편, 어떻게 보면 중재 역할을 하는 사람에게 암묵적으로 ‘나를 홍보해 주세요’라는 부담을 지우는 것 같다는 의구심도 든다.

특히 나는 기억력이 나쁘기 때문에 “식구들에게 안부 전해 주세요”라는 부탁을 받으면 ‘분명 잊어버릴텐데’하는 부담감과 죄책감이 동시에 들어 마음이 불편해진다. 그래서 그런 부탁을 받을 경우 그저 식구들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는 인사말로 해석해서 고맙다고 하고 바로 잊어버린다.

문제를 제기했으면 뭔가 대안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서, 제3자를 경유한 안부 인사 전달의 실질적인 대안을 생각해 보았다:

  1. 작은 선물을 준비한다: “식구들에게 안부를 전해 주세요”라고 하기 보다 “작은 선물을 준비했는데 아이들에게 전해 주실래요?”라고 하는 편이 훨씬 더 실질적이다. (단, 선물을 받으면 반드시 되갚아야 한다는 의무감이 발생하는 문화권에서는 이런 호의가 오히려 폐가 될 수 있으므로 주의와 분별이 필요하다.)
  2. 축복의 말을 중개인에게 바로 말한다: 인사말을 전달해 달라고 간접적으로 표현하기 보다 “부인과 아이들이 앞으로도 계속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관계의 매개가 되는 상대에게 직접 이야기해도 그 인사의 취지는 전달된다.
  3. 직접 메시지를 전한다: 중개인이 동의한다면 연락처를 얻어 “안녕? 난 너희 아빠 친구인데 신세를 많이 지고 있지. 아빠가 너희들을 무척 자랑스러워 하시더구나. 새해 복많이 받아라!” 등의 메시지를 문자나 이메일, 혹은 편지 등으로 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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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king scene

©2019 Soonuk Jung. The Carffing Cafe 1
©2019 Soonuk Jung. The Carffing Cafe 2

WordPress 5.0으로 업그레이드하면서 포스팅 앞부분 텍스트 일부가 없어지는 안타까운 일을 겪었지만 한 가지 긍정적인 것은 사진을 손쉽게 full-width로 올릴 수 있게 된 것.

위 사진은 경기도 용인시 기흥에 위치한 더 카핑 카페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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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와 칼

“서양인은 대개 인습에 반기를 들어 많은 장애를 극복하고 행복을 찾아가는 것을 강함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본인의 견해에 따르면 강자란 개인적인 행복을 버리고 의무를 좇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굳센 인격의 소유자인가 아닌가는 반항이 아닌 복종을 통해 드러난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루스 베네딕트 지음, 김승호 옮김, “국화와 칼: 일본 문화의 유형”(책만드는집 2017), pp238-239.

1944년, 일본과 전쟁을 한참 치르던 중인 미국 정부는 차후 일본을 점령하고 다스릴 것을 예상하고, 일본인을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 인류학자인 루스 베네딕트에게 일본인 연구를 맡긴다. 일본에 가보지도 못한 그녀가 작성하여 1946년에 발간된 책 “국화와 칼”의 명성을 오래 들어오다 마침내 읽게 되었다.

영어는 꽤 난해해서 포기하고, 비교적 최근에 다시 나온 번역본(김승호 옮김, 책만드는집 2017)으로 읽는 중. 번역이 매끄러워 훨씬 읽기가 수월하다.

이 책에서 인용하는, 1830년대에 쓰인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미국 연구서 <<미국의 민주주의>>를 통해, 미국 문화 역시 유럽의 문화와는 다른, 특이한 면모가 있었다는 점을 알게 되는 점도 매우 흥미롭다. 계층적 사회를 이루던 유럽인에게는 당시 미국의 평등한 문화가 매우 독특하게 보였다고 한다. 그런 미국인이 보는 일본의 계층적 문화 또한 매우 이질적이었다.

일본인 입장에서 본 일본 문화 연구서인, 야마모토 시치헤이 지음 <<공기의 연구>>도 재미있지만, 미국인 관점에서 본 일본 문화 연구도 무척 흥미롭다.

미국과 일본 간의 문화 비교 연구가 타산지석이 되어 한국 문화 이해에 참고가 된다. 특히 “자유”와 “평등”이라는 개념이 한국의 전통적 관점에서는 매우 낯선 것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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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ody keeps the score

“또한 의사들이 환자들이 이룬 성과와 그들이 가진 열망, 마음을 쓰고 사랑하는 대상이나 증오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또 무엇이 환자의 행동에 동기를 부여하고 행동을 이끌어 내는지, 무엇이 환자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고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평온함을 느끼게 하는지, 즉 환자의 삶의 생태에 관심을 거의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베셀 반 데어 콜크 지음, 제효영 옮김, <<몸은 기억한다>>(을유문화사 2016) 원제: The Body Keeps the Score, p58

위의 글은 책의 저자가 젊은 시절, 정신과 병동에서 일하면서 관찰한 의사들의 행동에 관한 기술이다. 당시 연구 보조 역할을 맡았던 저자는 병원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 잠을 이루지 못하는 정신 병동 환자들이 한 밤 중에 나와 자기 사연–주로 트라우마–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기회가 많았다. 그런 한편, 대체로 환자와의 접촉 시간이 짧은 의사들은 환자들의 사연에 대해 별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이 의아하게 느껴졌다는 점에 대해 적은 것이다.

대체로 의사들은 질환의 치료를 위해 확인 가능한, 구체적 증상에 관심이 있으므로 환자가 넋두리처럼 이야기하는 속사정에 귀를 기울이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으리라는 점은 이해가 간다. 겉으로 드러난 증상을 파악하기도 어려운 마당에 잠재된 원인을 파헤치고 증상과의 인과 관계를 연결하려는 시도가 벅찰 수도 있으니까.

마찬가지로, 학부모의 관심이 “특정 대학 합격”이라는 결과에 지나치게 몰입되는 경우, 자녀의 일상적 감정이 어떤지, 아이의 열정이나 관심의 대상이 무엇인지, 대인관계에서 어떤 고민이 있는지 따위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닐 수 있다. “지금 그런 거 신경 쓸 때야? 그런 고민은 대학 가고 나서 해!”라고 윽박지르는 부모의 다그침은 치열한 경쟁의 현실이 빤히 눈에 보이는 부모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일리 있는 말이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시기 한가운데에 있는 십대 자녀에게는 인생에 대한 환멸을 느낄만큼 가혹한 표현으로 들릴 수 있다.

특별한 계기가 없다면 인간이 세상을 보는 관점은 잘 바뀌지 않는다. 따라서 “특정 대학 합격”이라는 목표에 최고의 가치를 이미 부여해 버린 부모를 납득시켜 그들의 관점과 행동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낮다. 대체로 그런 부모는 집요하게 따라 붙는 열 추적 미사일처럼, 대학 입학의 목표가 달성되거나 혹은 애당초 그 목표 자체가 무리였음이 확인될 때까지는 끊임 없이 자녀를 압박하고 추동하는(밀어붙이는) 언행을 멈추지 않으리라 예상된다. 안타깝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이런 부모의 가혹한 압박이 마음에 상처를 주기는 하겠지만, 이런 풍상(風霜)을 견디고 극복하는 삶의 선택은 여전히 자녀 각자의 몫이다. 부모가 원망스러울 수는 있겠지만, 인간의 삶은 어떤 형태로든 시련을 맞기 마련이므로, 남을 탓하며 주저 앉기 보다, 그리고 무기력하게 떠밀려 가기 보다,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이 가야 하는 좁은 길–옳은 길–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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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의 취향

살아오면서 좋아하게 된 음악이 얼마간 있는데, 그 중 일부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Astor Piazzolla, Four Seasons of Buenos Aires (Cuatro Estaciones Porteñas)
Sergei Rachmaninoff, Piano Concertos No. 2
Ludwig van Beethoven, Symphony No. 7, Mov. 2 (Allegretto)

잠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 보았는데, 내 장례식장에 좋은 앰프와 스피커를 설치해서 위와 같은 음악을 계속 틀어놓으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물론 당사자(나)는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망자를 위해 틀어주는 것은 아니고 ‘고인은 이런 음악을 좋아하셨습니다’라고 조문객들에게 고인의 취향을 공유하는 것이다.

아주 나쁜 생각은 아닌 것 같지만, 음악적 취향은 대체로 개인적인 것이어서 내가 좋아한다고 다른 사람들도 꼭 마음에 들어하리라는 법은 없으니 괜히 남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말하자면, 조문을 갔는데 배경음악으로 예컨대 홍진영의 “잘가라”나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라트라비아타 중 “축배의 노래”가 흘러나오면 아무리 그것이 고인의 애청곡이었다고 해도 “이게 아닌데”하며 언짢아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사후에 자기 취향을 남에게 강요하기 보다 살아 있을 때 자기나 실컷 듣는 것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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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함을 받아들이기

워드프레스를 5.0으로 업그레이드했더니 기존 블로그 포스트 텍스트의 앞부분 일부가 사라져버리는 현상이 발생했다. 모든 포스트가 그런 것도 아니고 사라진 텍스트의 분량도 일정하지 않아서 도대체 어떤 이유로 사라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어떤 포스팅은 제목만 남기고 내용 전체가 사라진 경우도 있다. (예: 2015년 1월 15일자 포스팅 “obligation to write“)

과거 포스팅을 읽다가 내용이 왠지 어색하다면 문장 앞 부분이 사라져서 그런 것이다.

(그 외에도 문단이 합쳐진다거나 사진의 위치가 달라지는 등의 문제도 있지만 텍스트가 사라진 것에 비하면 약과다.)

과거의 백업 파일을 참조해서 일일히 복구할 수는 있겠지만 900개 가량의 포스팅을 하나씩 살펴가며 고치려니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불완전한 대로, 부족한대로 받아들이고 살아야할까보다 생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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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마시는 방법

작업 중에 한숨 돌리기 위해 차를 한 잔 마시는 것과 누군가를 만나 차 한 잔 하는 것은 마시는 행위는 비슷하지만 맥락이 크게 다르다.

혼자 마실 때는 어떻게 하든 상관이 없겠지만 다른 사람과 교제를 하는 맥락에서 차를 마실 때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형식과 작법(作法: 일정한 규칙)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런 작법은 문화권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일본, 중국, 영국, 한국 모두 차를 마시지만 차를 둘러싼 행동 규칙과 형식이 저마다 다르다. 심지어 찻잔을 드는 방식에도 각자의 특징이 존재한다. 예컨대 일본은 전통적으로 찻잔을 두 손으로 들어올리고, 영국은 한 손으로는 찻받침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찻잔을 드는 것이 매너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규칙은 해당 문화에 살아보지 않으면 좀처럼 알기 어렵다.

그러나 문화를 막론하고 대체로 “차 대접”이라는 형식의 공통점은 각자 알아서 타먹는 게 아니라 누군가 다른 사람이 타준다는 것이 그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카페에서는 바리스타가 그 일을 대신 해준다.)

그러니까 차 대접을 하면서 “알아서 내려드세요”, “커피는 셀프”하고 하면 일반적인 맥락에서는 굉장히 어색해진다. 식후에 식당에서 마시는 자판기 커피라고 할지라도 누군가가 받아서 쟁반에 갖다주면 그 느낌이 사뭇 다른 것이다.

“남이 타주는 행위”가 차 대접의 핵심이라고 한다면 대접 받는 사람이 특별히 유의해야 하는 점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차를 타서 내주는 사람의 행동 그 자체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가지는 한편 차의 맛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말아야 한다는 것. 물론 특별히 맛있는 차를 대접받는다면 그 점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말아야하지만 혹시라도 차가 입맛에 맞지 않더라도 차의 맛이 핵심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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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ring Greatly

넷플릭스에 Brené Brown의 강연 The Call to Courage가 떴다고 해서 들어보았습니다. 그녀의 강연 중, 테어도어 루즈벨트의 말이 인용되고 있어서 그 본문을 공부삼아 우리말로 옮겨 보았습니다.

“It is not the critic who counts; not the man who points out how the strong man stumbles, or where the doer of deeds could have done them better. The credit belongs to the man who is actually in the arena, whose face is marred by dust and sweat and blood; who strives valiantly; who errs, who comes short again and again, because there is no effort without error and shortcoming; but who does actually strive to do the deeds; who knows great enthusiasms, the great devotions; who spends himself in a worthy cause; who at the best knows in the end the triumph of high achievement, and who at the worst, if he fails, at least fails while daring greatly, so that his place shall never be with those cold and timid souls who neither know victory nor defeat.”

Theodore Roosevelt (from his speech titled “Citizenship in a Republic,” April 23, 1910)

“남을 비평하는 사람들은 수에 칠 가치가 없습니다. 힘있는 사람의 실수를 지적이나 하고 실제로 일하는 사람들의 부족함을 들춰내기 급급한 사람들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 인정받아야 할 사람은 경기장 안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얼굴이 흙과 땀과 피에 절은 채 용맹스럽게 수고하는 바로 그 사람 말입니다. 그는 실수도 하고, 거듭 실패합니다. 모든 노력에는 실수와 부족함이 따르기 마련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는 실천을 위한 수고를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위대한 열정과 헌신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가치있는 명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마침내 그는 큰 성취의 영광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실패하더라도 적어도 그는 대담한 시도를 하다가 실패하는 것이기에 그는 승리도 패배도 알지 못하는 이 열정 없는 소인배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테오도어 루즈벨트 (1910년 4월 23일에 파리에서 이뤄진 연설 “공화국의 시민” 중에서)

#번역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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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에서 말의 순서에 대하여

번역을 하다보면 말의 순서와 표현의 미묘한 차이에 대해 신경이 쓰인다. 저자의 문장의 구조를 살릴 것인지, 의미를 살릴 것인지를 놓고 고민이 되곤 한다.

번역 연구의 자료로 무엇이 좋을까 생각해 보다가 성서가 떠올랐다. 워낙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었고, 그리고 같은 언어 안에서도 여러 번역본이 있어서 비교 연구 자료로서 쓰임새가 많다고 느껴진다.

예컨대, 시편 122편 1절은 다음과 같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시편 122:1 (개역개정)

이 문장은 크게 세 단위로 구성된다: (1)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2)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3) 내가 기뻐하였도다.

같은 구절의 영어 번역 순서는 다르게 구성되어 있다. (1) 나는 기뻤다 (2) 그들이 내게 말했을 때 (3) 여호와의 집으로 들어가자.

I was glad when they said unto me, Let us go into the house of the LORD.

Psalm 122:1 (King James Version)

일본어의 경우 번역본마다 다른데, 新改譯의 경우 우리말 순서와 비슷하다. (1) 사람들이 나에게 (2) 주의 집으로 가자라고 말했을 때 (3) 나는 기뻤다.

人々が私に、「さあ、【主】の家に行こう」と言ったとき、私は喜んだ。

詩篇122: 1 (新改譯)

한편, 일본어 新共同譯의 순서는 (1) 주의 집에 가자 (2) 라고 사람들이 말했을 때 (3) 나는 기뻤다

主の 家に 行こう, と 人々が 言ったとき /わたしはうれしかった.

詩篇122: 1 (新共同譯)

중국어 Union Version도 우리말 순서와 같다. (1) 사람들이 내게 말했다 (2) 여호와의 전으로 가자 (3) 나는 기뻤다.

 人对我说,我们往耶和华的殿去,我就欢喜。

诗篇 122 (Union Version)

궁금한 것은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이 세 단위의 순서가 과연 어떻게 되어 있을까 하는 것이다. 문장에는 두괄식도 있고 미괄식도 있는 것이니 맨 앞에 나오는 내용이 꼭 중요한 내용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번역본마다 이렇게 다르니 어쨌든 이 시의 저자는 세 단위 중 무엇을 맨 앞에 두었을지 궁금했다.

히브리어 성경 풀이를 참조해 보았더니 원문의 순서는 영어와 같았다. 즉, (1) 나는 기뻤다 (2) 사람들이 말했을 때 (3) 여호와의 집으로 가자.

이미지: https://www.ancient-hebrew.org/hebrewbible/Psalms_122.html

원문처럼 “나는 기뻤다”를 맨 앞에 둔 것은 감정의 표현(expression)에 가깝고, 우리말 번역처럼 “나는 기뻤다”를 맨 뒤에 둔 것은 상황 설명(explanation)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히브리어 원문과 영어 번역에서는 “나는 기뻤다”라는 개인의 감정 표현이 먼저 언급되는 반면, 한국어, 일어, 중국어에서는 나의 감정보다 주변 사람들의 행동이 먼저 언급된다. 문화에 따라 개인의 감정과 주변의 상황 중에서 어느 쪽에 더 무게를 주는지가 번역의 차이에서 드러난다고 볼 수도 있을까?

번역시 문장 구조의 차이를 나타내는 또 하나의 예는 신약 마태복음 5장의 팔복의 경우. 우리말 번역은 (1) 어떠어떠한 자는 (2) 복이 있다 로 되어 있는 반면, 그리스어 및 영어 성경은 (1) 복되도다 (Blessed are…) (2) 어떠어떠한 자여 의 구조로 되어 있어 말의 순서가 주는 느낌이 미묘하게 다르다.

#번역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