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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ngs I See

나는 글씨체에 민감하다. 아래는 어느 까페에서 본 글씨체. 블루베리의 느낌을 잘 표현했다. 누군가의 기여로 소비자의 경험이 이만큼 더 풍부해졌다:

밥먹다 말고 만들어 본 푸드아트:

우리나라 방방곡곡 도로에서 토목 공사 현장을 지키는 안드로이드 로봇(?):

사용자 인터페이스 디자인 연구에 도움이 되는 손자국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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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iven by fear

고등학교 2학년 말, 중고등학교 내내 그저 평범한 성적에 만족하고 있었던 나를 한순간에 공부에 몰두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 것은 다름아닌 두려움이었다. 대학 입시에서 어설픈 결과가 나올 경우 평생 비교 당하면서 살게 될지 모른다는 갑작스런 자각에서 비롯된 두려움. 단지 그것 뿐이었다. 그 당시 상황이 그랬다.

특정 대학에 가서 특정 전공을 공부해서 무언가가 되겠다는 포부나 야망 따위는 전혀 없었다. 등수나 점수는 나에게 별 의미가 없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되기를 바라는 어른들의 기대도 내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남과 비교 당하는 일만 생기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새벽부터 밤늦도록 학원과 과외공부로 시간을 보내는 청소년들의 생활양식에서 느껴지는 것은 ‘성실함’이나 ‘부지런함’이라기 보다는 ‘절박함’이다. 청소년기에 누릴 수 있는 다양한 삶의 경험을 탐색하는 기회를 희생하고 이런 치열하고 절박한 생활을 수년간 지속할 수 있도록, 또는 그런 삶을 강제하도록 만드는 동인(driving force)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두려움이 아닐까?


오스틴에 위치한 텍사스주립대 경영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가르쳤던 Steven Tomlinson 교수(현재는 Acton MBA로 옮김)는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요소에는 공포와 사랑 두 종류가 존재하는데 공포보다는 사랑이 훨씬 더 강력하고 오래 지속되는 동기가 된다고 강조한 바 있다. 나에게는 그 말이 그렇게 인상적이었다.


Richard Saul Wurman이 말하길 학습이란 ‘자신이 흥미를 가진 내용을 기억하는 것(Learning is remembering what you are interested in.)’이라고 했는데 ‘대학에 못 들어가면 한국 사회에서 인간대접 받기 어려우니 살아남기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관점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지식과 경험이 주는 즐거움을 사랑하기 때문에 공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나마 뒤늦게라도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게 된 것은 두려움 덕분이었다. 하지만 막상 대학에 입학하고 두려움의 원인이 소멸하자 나로 하여금 공부하도록 만든 효과 역시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절박하지 않으니 집중력도 없어지는 것이다.

시간이 훨씬 지나고 나서야 무언가를 새롭게 알아가고 깨닫는 것에서 오는 희열을 몸서리치도록 느낄 수 있었다. 진정한 관심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무언가를 배우는 것은 겁에 질려 어쩔 수 없이 공부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경험이다.


아이들이 공부하고 싶도록 만드는 부모와 교사, 직원들이 일하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경영자, 사람들이 따르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도록 만드는 지도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