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자신의 죽음과 관련해서 사후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유서나 유언을 남기는 것이다. 물론 이 방법은 강제적이기보다는 다분히 의존적이다. 예컨대 장례 방법으로 화장(火葬, cremation)을 부탁했더라도 실제로 어떤 방법으로 장례가 치뤄지는 지에 대해 자신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유족들이 그렇게 준행해 주기를 기대할 뿐이다.
자신의 사후에까지 자신의 영향력이 이어지도록 하는 보다 적극적인 방법으로는 그 효과가 지속성이 있는 결정을 내리고 이를 생전에 실행하는 것이다. 예컨대 자신이 의미있게 여기는 대의명분을 위해 유산을 가족에게 남기기 보다 특정 재단에 헌납하고 싶다면 유언으로 남기기 보다는 생전에 직접 이를 실행하는 것이 확실한 방법이다.
그러나 생전에든 사후에든 스스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자신의 영향력의 범위 밖에 있는 일들이 훨씬 더 많다. 예컨대 남북 통일이 되거든 자신의 유골을 함경도 고향 땅에 묻어달라는 부탁을 들어드리고 싶어도 남북 통일이라는 전제 자체가 개인의 영향력 밖에 있는 일이라서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사후에 대해서는 소박한 기대 만을 주변 사람들에게 전하고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게 되고 사후에 벌어질 대부분의 일들에 대해서는 마음을 비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편, 자신의 사후에 벌어질 상황에 대한 염려를 미리하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 예컨대 장애를 가진 자녀를 돌봐 줄 사람이 없이 부모가 먼저 죽을 경우 부모의 마음은 큰 고통을 느끼게 된다. 실질적으로 자녀를 보호할 유일한 해결책이 오로지 자신 뿐이었다면 자신의 죽음은 해결책의 종말이자 문제의 개시점(開始點)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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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자(亡者)가 남은 이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영향력이 유서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라면, 이와는 반대로 남은 이들이 곧 세상을 떠날 사람에게 전해주는 “사전(死前) 통지문”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가 “당신이 죽은 후에 이렇게 할 작정이예요”라고 미리 알려주는 것은 그 내용에 따라서 좋은 일이 될 수도 있고 잔인한 일이 될 수도 있다. 예컨대 “자네가 죽더라도 아이들은 우리가 책임질 걸세”하고 친구들이 확신을 준다면 세상을 떠나는 이의 마음은 한결 가벼울 것이다. 물론 망자에 대한 약속의 이행 책임은 과연 언제까지 유효한가하는 문제가 따를 수도 있다. 상황에 따라서는 약속을 이행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곧 죽음을 맞이할 이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거나 무의미하게 만들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그것이 아무리 사실이라고 할지라도–미리 이야기해 주지 않는 것이 최소한의 자비를 베푸는 일이리라. 예컨대 “사장님께서 돌아가시고 나면 회사는 청산할 작정입니다”라고 미리 이야기할 필요가 과연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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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 대한 의지의 표현은 참으로 조심스럽다. 그것이 유언이든 사전 통지문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