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 2014년 12월

  • 인사의 의미

    “우리는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을 타인에게 먼저 증여함으로써만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축복의 말을 듣고 싶다면, 우선 내가 먼저 ‘당신에게 언제나 행복이 가득하기를’ 기원해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먼저 증여하는 것에서 모든 것은 시작되니까요.”

    — 우치다 타츠루 지음, 김경원 옮김, 혼자 못사는 것도 재주, 북뱅, p292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라는 말은 지나치게 단순화되어버린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긴 하지만 그 속뜻은 “이번 한 해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당신이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하는 일에서 좋은 결과가 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상대방을 향한 축복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다. 이런 덕담을 먼저 줌으로써 관계가 이어지고 공동체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자립은 ‘그 사람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의 수를 늘림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고 나는 썼습니다. ‘그 사람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에 대해 우린 필시 ‘당신이 앞으로 계속해서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바랍니다’라고 기도합니다. 그런 축복의 말에는 반드시 똑같은 축복의 말이 돌아옵니다. 덕담에 대해서는 반드시 덕담으로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중략] 이와 마찬가지로 ‘당신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당신의 무궁한 건강과 행복을 간절하게 기원합니다’라는 덕담에 대해서도 그와 같은 말로 응답하는 것이 인류학적으로 의무화되어 있습니다.”

    — 같은 책, p291

    이제서라도 인사에 이런 뜻이 있음을 알게 되어 다행이다. (*그리고 인사말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문자적으로는 별다른 뜻이 없다는 지적도 있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먼저 인사를 건넨다는 것은 자신의 취약성을 드러낸다는 의미도 있다고 우치다 타츠루는 철학자 엠마뉘엘 레비나스에 관한 책에서 적고 있다.

    “‘인사’를 보내는 것은 ‘파롤이란 선물’이 ‘당신’에게 보내지지 않고, 보내져도 묵살된다는 ‘리스크’를 미리 받아들이고 있다. 나는 자신의 취약한 옆구리를 우선 ‘당신’에게 드러낸다. ‘당신’은 나를 상처입힐 수 있다. 나는 ‘당신’에 의해 상처받을 수 있다고 알리면서, ‘인사’는 보내진다.”

    — 우치다 타츠루 지음, 이수정 옮김,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갈라파고스, p74

    다른 식으로 풀어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내가 남에게 덕담을 건넬 때 상대방도 덕담으로 응답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간혹 상대방에게 무시당하는 경우도 있다. 나는 웃는 얼굴로 정중하게 인사했는데 상대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형식적으로 답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연하장이나 명절선물을 보내도 고맙다는 문자 메시지 조차 돌아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누군가에게 인사를 건넨다는 건 자존심과 감정에 상처받을 가능성이 포함된 모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먼저 인사를 건네려면 대담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이야기다. 썰렁한 반응을 받을 수도 있다는 리스크를 안고서라도 남에게 기꺼이 축복하는 마음으로 인사를 해야 한다는 각오를 다지고 새해를 맞이해야 겠다.

    “만일 너희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다른 사람들보다 너희가 더 나을 것이 무엇이냐? 심지어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하도록 하여라.”

    — 마태복음 5:47-48 (쉬운성경)
  • how to end a year

    토시코시소바를 먹는 습관이 있다는 이야기를 “우동 한 그릇“이라는 짧은 동화 이야기를 통해 들었고, 미국에서는 12월 31일 밤에 파티를 여는 풍습이 있음을 여러 영화를 통해 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2월 31일 자정무렵에 종각 앞에 모여 “제야의 종“을 듣는 풍습이 있다.

    무엇이 되었든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의 경계를 넘는 과정에서 뭔가 경험적인 이정표(milestone)를 구체화하는 것은 바람직한 면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어려서부터 우리집에서는 12월 31일 저녁에 열리는 송구영신 예배를 참석하는 것이 관례였다. 자정까지 송구영신 예배가 이어져 새해를 함께 맞이하는 교회도 있지만 우리 가정이 줄곧 출석했던 교회에서는 주로 저녁 8-9시 무렵이면 끝이 났고 바로 다음날 1월 1일 아침 6시 경에 신년 예배가 열렸다.

    결혼과 함께 새로 가정을 꾸리면서 아직 그렇다할 우리 가정만의 송구영신 리추얼을 마련하지 못했다. 밤 늦게까지 돌아다니는 것도, 새벽까지 깨어있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터라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엉뚱하더라도 뭔가 우리 가족만의 리추얼이 있다면 그런대로 아이들에게 추억을 남겨줄 수 있을텐데. 가져봄직한 몇 가지 예를 생각해보자.

    1. 냉장고 비우기 – 12월 29-31일 동안 장보기를 최소화하면서 냉장고를 싹 비우기
    2. Family Annual Award – 식구마다 뭔가 하나씩 상을 정해서 시상하기. 예컨대 한 해동안 피아노를 열심히 연습한 막내에게는 “끈기상”
    3. New Year’s Resolution – 12월 30-31일에 새해의 다짐을 미리 적어놓고 1월 1일에 발표하기
    4. 가족사진 찍기 – 12월 31일 자정에 모두 정장을 하고 사진을 찍는다
    5. 가족예배 드리기 – 교회에서 드리는 송구영신 예배와는 별도로 가족끼리 모여 예배를 드린다
    6. 짝잃은 양말 버리기 – 어디 갈 곳이 없을 터인데도 짝잃은 양말이 생긴다. 그동안 모아놓았던 짝잃은 양말에게 아쉽지만 작별을 고하는 시간을 가진다
    7. 책거리 – 가족이 모여 한 해동안 읽은 책 중에서 의미있었던 책을 한 권씩 골라 돌아가며 설명하기
    8. 연하장 쓰기 – 가족사진과 식구들의 서명이 들어간 연하장을 12월 31일에 써서 1월 1일에 우체통에 넣기. 발송 대상은 그 해 담임을 맡아주셨던 학교와 교회 주일학교 선생님들, 멀리 떨어져 있는 친척과 친구들
    9. Movie Week – 12월 26일부터 31일까지 매일 저녁 고전 영화 한 편씩 감상하기
  • inability to grasp

    “마침 다른 연구의 참고문헌으로 레비나스의 책을 읽고 있었지만 무엇을 말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 우치다 타츠루 지음, 박동섭 옮김, 교사를 춤추게하라, 민들레, p253

    우치다 타츠루가 거듭 엠마뉘엘 레비나스를 자신의 스승이라고 말하길래 레비나스의 저서와 그에 관한 책을 들춰봤는데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우치다 타츠루 자신도 그의 책을 접하고서는 “무엇을 말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라고 쓴 것에서 한편으로는 안도감을 느꼈다. ‘아, 원래 이해가 안 되는 게 맞는 거구나.’

    이 느낌은 마치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을 읽고 나서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라고 느꼈던 것과 비슷한 점이 있다. 내 이해력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뭔가 있어!’하고 살짝 압도당하는 느낌이라고 해야할지. 한번 읽어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상대방과 나와의 격차가 존재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이면 오히려 편하다. 바울도 자신의 미완성인 상태를 받아들인 것 처럼 말이다.

    “내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이미 완성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아직 목표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리고 있으며,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 빌립보서 3:12 (쉬운성경)

  • quote: 우치다 타츠루, 스승은 있다

    우치다 타츠루의 책 “스승은 있다”(박동섭 옮김, 민들레)는 약간은 수수께끼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데 저자는 그런 대화의 미확정성이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을 이룬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상대방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다 알아버린다면 커뮤니케이션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오히려 상대의 말에 대해 알쏭달쏭하게 생각할 수 있는 여지, 또는 주관적 해석의 여지가 남아 있는 대화가 좋은 대화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런 식으로 적어놓고 독자가 잘 이해하지 못했다면 그걸로 됐다라는 식으로 책을 마무리 짓는다.

    “뭐라고요? 여기까지 읽었는데 우치다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모르겠다고요? ” 당신, 이런 책을 써서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 겁니까?” 음…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만 노선생은 실례하겠습니다. 부디 용서를!”

    — 우치다 타츠루 지음, 박동섭 옮김, “스승은 있다“, 민들레, p150

    선생이 던져주는 지식 그대로를 외우는 것으로는 배움이 성립하지 않고, 학생 스스로 의문을 품고 선생이 하는 말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해서 이해할 때 비로소 배움이 성립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다. 다만 모든 일에 대해 ‘무엇이든 본인이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흘러가버리면 곤란한 점도 있다. 과학은 각 개인의 주관적 이해를 넘어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사실이 존재함을 전제로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런 취지에서 “깨달음”–사물의 이치에 대한 주관적 이해와 해석–이 배움의 끝은 아닐 것이라 생각된다.

  • 스승의 가르침

    우치다 타츠루의 책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김경원 옮김, 메멘토)에 인상적인 내용이 있었다.

    오카다: 우치다 선생님은 어디에서 그런 깨달음을 얻으셨어요?

    우치다: 음, 아무래도 참다운 스승을 만났기 때문이겠지요. 내가 스승님으로 우러러보는 분은 합기도회 본부 사범이신 다다 히로시 선생님과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 선생님입니다. 다다 선생님은 세계적인 무도인이시고, 레비나스 선생님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 중 한 분이시지요.”

    — 우치다 타츠루, 오카다 도시오 지음, 김경원 옮김,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 메멘토, p167

    에마뉘엘 레비나스라는 인물이 궁금해져서 그에 관한 책을 읽어볼 예정이다. 우치다 타츠루가 쓴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이수정 옮김, 갈라파고스)과 강영안 교수가 쓴 “타인의 얼굴“(문학과 지성사)의 도움을 얻으려 한다. 마침 오늘이 레비나스 서거 19주기가 되는 날이다.(1995년 12월 25일에 작고)

    한편, C.S. Lewis가 존경하는 스승은 George MacDonald라는 인물이었다. C.S. Lewis는 조지 맥도날드의 어록(Anthology)을 책으로 펴내면서 서론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I have never concealed the fact that I regarded him as my master; indeed I fancy I have never written a book in which I did not quote from him.”

    — C.S. Lewis, in the preface to George MacDonald: An Anthology

    대략 옮기면 이렇다: “나는 그를 나의 스승으로 여긴다는 사실을 숨긴 적이 없습니다. 실제로 제가 쓴 책에서 그의 말을 인용하지 않은 경우는 한번도 없었다고 생각되네요.”

    존경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은 엄청난 행복이라고 우치다 타츠루는 말했는데 정말 그런 것 같다.

    “그러나 그대는 그대가 배워서 굳게 믿는 그 진리 안에 머무십시오. 그대는 그것을 누구에게서 배웠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 디모데후서 3:14 (새번역)
  • quote: 우치다 타츠루,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

    “결단을 내려야 하는 궁지에 몰리기 훨씬 전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해야 해요. ‘유사시에 당신은 어떤 적절한 행동을 합니까?’라는 문제와 ‘나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떻게 합니까?’라는 문제는 차원이 전혀 다른 이야기예요.”

    — 우치다 타츠루, 오카다 도시오 지음, 김경원 옮김,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 메멘토, p201

    각자의 분야에서 나름의 입지를 구축한 두 사람이 나눈 대담을 기초로 책을 만드는 경우를 일본 출판물에서 종종 보게 된다. “식견있는 잡담”조차 공유가치가 있는 소프트웨어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당사자들의 통찰력이 남달리 깊고 예리해야 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을 주고 받은 일상적인 대화로는 책을 내기는 무리다.

    일본의 저술가 우치다 타츠루와 오타쿠 계열의 비즈니스를 운영하는 사회비평가 오카다 도시오 두 사람의 대화를 엮은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은 처음에는 크게 인상적이지 않은, 그저 그런 대화로 시작하지만 뒤로 갈수록 흥미진진한 내용이 많아진다.

    전체적으로, 우치다 타츠루와 정신과 의사인 나코시 야스후미의 대담을 기초로 만든 책 “14세 아이를 가진 부모들에게“만큼은 내용이 조밀하지는 못하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익한 통찰이 가득하다.

    저자들에 의하면 두 사람의 대담을 기초로 한 원고를 수정하는 데 우치다 타츠루는 일년 반이 걸렸다고 하고 오카다 도시오는 반나절 걸려서 고작 스무 줄 고쳐서 탈고했다고 한다.(p25) 그래서 그런지, 아니면 나의 편견 때문인지 두 사람의 이야기 중에서 우치다 타츠루의 이야기가 더 무게가 느껴졌다.

    책 속의 많은 부분은 우치다 타츠루의 다른 저서에서 이미 언급된 바 있어 겹치긴 하지만 반복해서 생각해볼만한 중요한 이야기라서 오히려 반가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 somewhere in my youth

    영화 Sound of Music 중에 “I Must Have Done Something Good”이란 곡이 있다. 

    무척이나 감미로운 곡조를 가진 이 노래 중에 “somewhere in my youth or childhood, I must have done something good”이란 가사가 나온다. 이 가사 앞뒤 부분의 내용을 살펴보면 ‘세상에 공짜는 없고 모든 일에는 뭔가 원인이 있기 마련인데(“nothing comes from nothing”) 이렇게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는 걸 보면 자기가 어릴 적에 뭔가 좋은 일을 하긴 한 모양이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행복에 겨워 하는 말이긴 하지만 자신이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조차 인과응보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는 걸까 의문을 가지게 된다. 다른 사람의 호의나 친절에 대해 “뭔가 이유가 있지 않고서야 이렇게 잘 해줄리가 없어. 아마도 과거에 내가 뭔가 좋은 일을 했나봐”라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이유를 찾으려 하기 보다 사랑의 동인(動因)이 사랑을 받는 편이 아닌, 사랑을 주는 편에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목숨을 바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을 위해 대신 죽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선하고 고귀한 사람을 보면 우리 안에 그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께 아무 쓸모가 없을 때에 당신의 아들을 희생적 죽음에 내어주심으로, 그렇게 우리를 위해 당신의 사랑을 아낌없이 내놓으셨습니다.”

    — 로마서 5:7-8 (유진 피터슨, 메시지 신약)

    *자신이 사랑받는다는 사실이 너무 고맙고 쑥스러운 나머지 반어적으로, 유머스럽게 표현한 것일수도 있다.

  • shadows of self-promotion

    “네가 너를 칭찬하지 말고, 남이 너를 칭찬하게 하여라. 칭찬은 남이 하여 주는 것이지, 자기의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 잠언 27:2 (새번역)
  • quote: 우치다 타츠루, 나코시 야스후미 공저, 14세 아이를 가진 부모들에게

    교육과 관련된 다수의 저서를 쓴 우치다 타츠루와 사춘기 정신의학을 전문으로 하는 정신과 의사 나코시 야스후미 두 사람의 대화를 엮은 책. 남다른 생각과 관점을 가진 두 사람이 서로 주고받는 “식견있는 잡담”을 가지고 책을 만들었다고도 볼 수 있는데 간혹 책의 제목과 상관 없어 보이는 이야기로 새는 경우도 있지만 어쨌든 청소년 교육의 현실을 바라보는 이들의 예사롭지 않은 통찰이 재미있다.

    “‘어른’은 매사를 자신의 개인적인 기준에 기초해서 판단하고, 그 책임을 혼자 떠맡을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뿐만이 아닙니다. ‘어른이 아닌 사람들’의 부주의와 날림 공사를 묵묵히 치우고 정리하는 사람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아이’가 아닌 ‘어른’이니까 그만큼 ‘여분의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어른’이 일정 정도 있지 않으면 공동체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런 ‘어른’을 키우기 위한 교육 시스템이 현재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 우치다 타츠루, 나코시 야스후미 지음, 박동섭 옮김, “14세 아이를 가진 부모들에게“, 에듀니티, pp12-13

    현실의 문제를 다루는 책 중에는 대안과 희망을 제시하는 책이 있는가 하면,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하더라도 현실이 왜 그렇게 돌아가는지를 통찰력을 가지고 설명하는 책이 있다. 이 책은 후자에 가깝다. 무도 연구가이기도 한 우치다 타츠루는 자녀 교육에 있어서 아이들의 신체 언어를 읽어내기, 본질적인 상상력으로서의 체감의 중요성, 그리고 일상생활에서의 비언어적 소통을 강조하는데 내게는 이 점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일상생활은 아주 중요합니다. 되풀이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해요. 창의성이나 독창성에 대한 신화를 들먹이며 모두 일상을 업신여기지만 일상만큼 중요한 건 없습니다.”

    — 같은 책, p215

    또한 이들은 인터넷 상의 소셜 네트워크가 가지는 한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인터넷은 자신의 메시지를 발신하는 곳일 뿐이지, 타인의 메시지에 비평적 코멘트를 보태는 일에 대해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요. 신체가 담보하고 있는 억제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는 것에 대한 매너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것에 대한 매너는 다릅니다. 디지털 기호로서 대상을 다룰 때 인간은 잔혹해집니다.”

    — 같은 책, pp124-125

    우연인지 몰라도 바로 전날, 나는 페이스북 계정을 휴면상태로 전환했다. 적어도 3개월 내지 6개월 동안 사용하지 않으려고 말이다. 보다 오프라인적인 감성을 키우는데 시간을 더 쓰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에서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보기에는 지성이 정서의 풍부함인 것 같은데 말이죠. 세상일에 대해서 놀라거나, 감동하거나, 독특하게 생각하는 능력 말입니다.”

    — 같은 책, p97
  • quote: 사토 마나부, 배움으로부터 도주하는 아이들

    “이지매, 부등교, 학습붕괴, 소년범죄가 아이들 위기의 중심이 아니라면, 위기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매스컴들이 떠들고 있는 많은 ‘위기’가 만들어진 ‘위기’이며, 학령아동 1% 정도의 위기인 것에 비해 적어도 70-80%의 아이들을 엄습하고 있는 심각한 위기가 있다. 바로 ‘배움’으로부터의 도주이다.”

    — 사토 마나부 지음, 손우정, 김미란 옮김, “배움으로부터 도주하는 아이들“, 북코리아,2003, p19

    우치다 타츠루의 몇 저서에서 사토 마나부 교수를 인용한 것을 보고 읽기 시작한 책. 도쿄대학에서 교육학을 연구하는 사토 마나부(佐藤学, 1951년생) 교수가 2000, 2001년에 각각 발표한 두 권을 합본으로 엮은 책이다. 일본의 청소년들의 실태를 학생 개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전체 교육 시스템의 붕괴의 관점에서 바라본 내용으로서,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을 바라보는 유용한 관점을 제시한다. 저자는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교육은 노력과 경쟁을 통해 개인의 사회적 신분의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틀을 제공했다고 풀이한다. 그리고 이런 틀을 동아시아 국가들이 공통적으로 받아들였다고 본다.

    1980년대 이후, 일본 학생들이 공부도 하기 싫고 일도 하기 싫어하는 경향을 현저하게 나타내기 시작한 현상에 대해 저자는 산업화에 의한 고성장 시대가 끝나고 저성장 시대에 들어서면서 자녀들이 공부를 통해 부모보다 더 나은 사회적 신분을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이 현저히 줄어든 것이 학생들의 의욕상실과 무기력의 이유 중 하나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압축된 근대화가 종언을 맞이하자 그 파탄이 한꺼번에 드러났다. 이제 대다수의 아이들은 학교교육을 통해 부모보다 높은 교육력을 획득할 수도, 부모보다 높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할 수도 없다. 학교는 일부의 ‘성공팀’과 다수의 ‘실패팀’을 가르는 장소로 변모했다. 학교는 많은 아이들에게 실패와 좌절을 체험하는 장소가 되어버렸다.”

    — 같은 책, pp45-46

    저자는 교육의 위기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공부’와 ‘배움’을 구분하면서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공부’에서 ‘배움’으로의 전환이라고 말한다.

    “저자 자신은 공부와 배움의 차이를 ‘만남과 대화’의 유무에 있다고 생각한다. ‘공부’가 무엇과도 만나지 않고 아무런 대화도 없이 수행되는 것에 비해, ‘배움’은 사물이나 사람이나 사항과 만나고 대화하는 행위이며, 타자의 사고나 감정과 만나고 대화하는 행위이고, 자기자신과 만나고 대화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 같은 책, p65

    저자의 말대로 산업성장기가 막을 내리고 사회가 저성장기에 들어서면서 교육을 통한 사회적 신분 이동의 가능성이 낮아졌다면, 교육의 필요성과 효용을 무엇에서 찾아야 할까? 배움 자체가 추구할만한 보편적 가치로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아니면 최소한 사회적 신분의 “유지”를 위한 필요조건으로서 공부를 안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마지막으로, 인상적인 구절.

    “학력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알고 있는(할 수 있는) 수준으로 돌아가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모르는(할 수 없는)수준의 내용을 교사나 친구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모방하고 이를 스스로 내화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같은 책, p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