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 2018년 10월

  • OECD 통계 자료

    OECD 통계 자료를 보면서 그럴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지 출처: OECD Data: Working Age Population 위의 데이터에서 일본의 15-64세에 해당하는 노동 인구률이 1990년에 70%로 최고점을 찍고난 후 급격하게 감소하는 양상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일손이 모자란 것인가? 일본은 35개 OECD국가 중 이스라엘 다음으로 노동 인구률이 낮다. 이렇게 된 이유는 65세 이상의 인구가 25% 이상으로 매우 많다는 점이 일조하는 듯. (OECD Elderly Population Data 참조)

    흥미롭게도 한국의 노동 인구률은 35개 OECD 국가 중 최고(73%, 2014년)로 나온다. 그래서 취업난이 생긴 것이라고 봐야 하는가? 데이터를 이리저리 검색하다보면 흥미로운 내용을 알게 된다. 35개 OECD 국가 중 한국의 출생률(fertility rate)이 1.2로 가장 낮고 이스라엘의 인구 수는 약 800만 정도로 낮은 편이지만 출생률은 3.1로 가장 높다는 것도. (아래 그림 참조) 이미지 출처: OECD Data: Fertility Rates 한편 일본의 14세 이하 인구는 OECD국가 중 최하로 12.9%인데 한국의 14세 이하 인구 감소율은 일본보다 더 급격한 기울기로 떨어지고 있다. 보고 있으면 아찔하다. (아래 그림 참조) 이미지 출처: OECD Data: Young Population

    어쨌거나 OECD 데이터 웹사이트의 데이타 시각화 디자인이 뛰어나다. 추천. *각종 센서가 내장된 스마트폰이 보편화된 2010년대 이후의 데이터를 모으면 국가 차원의 상세한 국민 보건 통계나 개인 차원의 생활 방식 통계 자료 작성이 조만간 가능해질 듯.

  • 김만인 지음, 균형의 법칙

    김만인 지음, 『균형의 법칙』 (사곰 2014) 첫머리에서 인터넷에서 흔히 소비되는 정보와 이야기에 대해 아래와 같이 평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su_quote]이런 이야기들은 그 순간을 지나면 마음에 남는 것들이 아니다. 그 다음 날 아침에도, 먼 훗날에도 어떤 자취를 남기기보다는 그저 그 순간만 즐거운, 또는 남에게 얘기해줄 자극적인 이야깃거리들일 뿐이다. [su_highlight]이런 것들은 간혹 나는 지금 인생의 어느 지점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같은 제법 심각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졌을 때 도움이 될 수 있는 정보들이 아니다.[/su_highlight] — 김만인 지음, 『균형의 법칙』 (사곰 2014) p11[/su_quote]]]>

  • 신갈렙 지음, 암이래 어떡하지?

    암이래 어떡하지?”(전나무숲 2016) 중에서 “올바른 윤리를 가져라”라는 부분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su_quote]그 이유가 어떻든 암환자의 몸에 암종양이 생긴 것은 분명한 현실이며, 그것을 해결해야 하는 것도 환자 자신이다. 그런데 많은 암환자들이 자신에게 생긴 암종양을 다룰 때 자기는 책임도 능력도 없는 것처럼 한 발 뒤로 물러서고 돈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 의사들은 암을 치료하는 데 있어 암환자가 할 일이 거의 혹은 전혀 없고 다만 의사와 병원이 하는 말을 잘 따르라고 말한다. 암종양은 환자 자신이 만들었는데 정작 해결은 다른 존재, 즉 병원이 전적으로 해주길 기대하고 또 그렇게 해 줄 것처럼 의료기관은 처신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존적 태도가 더 큰 비극을 불러온다. 암환자들은 자신이 만든 결과물인 암종양에 대한 책임감은 별로 느끼지 않고 다만 그 대가만 지불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생각하는 비윤리적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 신갈렙 지음, “암이래 어떡하지?”(전나무숲 2016) pp 56-57[/su_quote] 암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생에서 발생한 여러가지 문제들에 대해서도 누군가 친절하고 유능한 사람이 나타나 해결해 주겠거나 하는 막연한 바램으로 뒷짐지고 물러나 있지 말고, 누구의 탓이 되었건 내 삶에 벌어진 일이니 나 스스로 주도적으로 해결책을 모색하는 결자해지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 자아, 이치, 관계 (1)

    source unknown[/su_quote] 인정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지만 굳이 남의 입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으려고 애쓰는 것은 허무하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결국 남에게 인정 받게 되더라도 그래서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다는 뜻이겠지. 신약성경 마태복음 4장에 예수께서 40일간 금식하신 후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그 시험은 세 단계로 이뤄져있다.

    1.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2.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쳐서, 너의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할 것이다’ 하였다.
    3. 네가 나에게 엎드려서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
    이 시험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앞의 두 경우는 결국 “너가 누구인지를 입증해 봐라(Prove yourself)”는 유혹으로, 그리고 세 번 째는 “이거 다 니 꺼 해라.(Claim for yourself.)”라는 유혹으로 볼 수 있겠다. 예수는 일관되게 자아를 입증하는 것보다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나타내는 구약 성경의 구절을 인용해 이 유혹을 이겨내신다. – – – 우리는 사회 생활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입증하고 인정받기 위해 이런 저런 자잘한 장치들을 활용하고 싶을 때가 있다. ‘사회적으로 위축감을 느끼지 않으려면 적어도 이 정도의 차는 타야지’, ‘좀 있어 보이는 사람들과 어울려서 나도 그 정도는 된다는 사회적 인정을 받으려면 특정 취미 생활은 기본이지’, ‘내가 누군데 아무데나 앉을 수는 없고 당연히 상석에 앉아야 격에 맞지’ 등의 생각이 스며들 때가 있다. 심지어 그런 생각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남이 허세를 부리는 모습은 우스워 보이지만 자기 속에 그런 생각이 들 때 이를 물리치기란 쉽지 않다. 자신은 아무 기대 없이 가만히 있는데 남이 와서 인정해 줄 때가 근사한 것이지, 스스로 ‘나 좀 알아주쇼’하고 들이미는 모습은 썩 고상해 보이지 않음을 일러주는 말씀도 있다: [su_quote]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 누가복음 14:10[/su_quote] 팀 켈러의 저서 “The Freedom of Self-Forgetfulness“에서 C. S. Lewis를 인용해서 말하듯, 자기 자신에 대해 조금이라도 덜 생각할수록 행복해 지는 게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