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 2019년 01월

  • On Improvement

    일본에 발뮤다(Balmuda)라는 가전제품 회사가 있는데, 이 회사는 이미 일상이 되어버린 가전제품을 재검토해서 가전업계가 기존의 고정관념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이럴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라고 일침을 놓는 제품을 연이어 출시하고 있다. 이 회사의 제품을 보면 “아앗, 이런 데까지 신경을 썼구나”라는 묘한 질투심과 패배감 비슷한 것을 느끼곤 한다. 얼핏 보기에는 “이건 누가 해도 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런 일을 해내는 사람이 앞서 나가는 것이므로 발뮤다와 데라오 켄 대표에게는 경의를 품고 있다.

    최근 출시한 제품은 The Light라는 이름의 탁상용 LED 조명인데 그림자가 생기지 않도록 조명의 반사 패턴을 디자인해서 사용자의 집중력을 높여준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게 별건가 싶을수도 있지만 ‘그림자는 생기기 마련이다’라는, 업계에서 생각하는 “탁상 조명의 당연한 속성”을 비틀어 ‘그림자가 없으면 집중이 잘 된다’는 새로운 당연함의 표준을 만들어냈다는 점이 이 회사의 특별한 점이다.

    고정관념에 발이 묶인 가전업계에 발뮤다가 의미있는 기여를 하는 것은 맞지만 문제는 제품의 가격이 상당히 높다는 것. 어떻게 보면 사소한 개선을 한 것인데 기존의 제품에 비해 대략 4-5배 가격으로 판매한다. 예컨대 The Light의 한국 출시 가격은 499,000원이라고. (지금은 가격이 많이 내려갔지만 일반 탁상용 LED 조명이 처음 나왔을 때의 가격은 약 10만원 안팎이었다.)

    이런 엄청난 가격 격차를 생각해 보면 이미 시중에 나와 있는 일반 제품을 살짝 손봐서 발뮤다에서 제시하는 “새로운 당연함”의 기준을 어느 정도 만족시킬 수 없을까 하는 궁리를 하고 싶어진다. “당연함”의 지평을 새롭게 열어준 발뮤다의 기여를 존중하면서도 그 혜택을 조금 더 손쉽게 누리도록 하기 위한, 덜 우아하지만 쓸만한 대안을 찾고 싶은 것이다.

    그림자를 없애는 것이 핵심이라면 가장 손쉬운 대안은 일반 탁상용 LED 램프를 3-4 개 구입해서 동시에 여러 방향에서 켜놓는 것. 온라인에서 판매되는 LED 스탠드 중 저렴한 것은 2만원 안팎의 가격이므로 멀티탭을 포함해 10만원 대에서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다. 다른 대안으로는 빛을 난반사 시킬 수 있는 반투명 필름을 소재로 해서 기존 LED 스탠드에 붙일 수 있는 부착물을 만드는 것. 물론 우아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림자를 없애서 집중력을 낸다는 효과를 얻는 것이 목적일 경우 하려고만 한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라는 것이 이 제안의 요체다.

    ㅈ다른 한편, 조명을 비롯한 여러 환경 조건이 완벽하게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자신의 공부나 업무에서 성과를 이뤄낸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고, 책상을 정리하지 않아 지저분한 상태에서 공부하거나 음악 심지어 동영상을 틀어놓고 간식을 먹으면서 공부하겠다고 책상에 앉아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조명이 주는 집중력 개선 효과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주문 버튼을 누르기에 앞서 책상에 앉았을 때 집중을 방해하는 결정적 요소가 과연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우선 몇 발자국 물러나 보다 큰 그림을 볼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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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oots: Where it all began

    나의 부모님이 태어나신 곳은 어디인지도 모르겠고, 그분들이 유년기를 보내고 자라신 곳은 이미 다른 건물이 들어서 있어서 예전 흔적을 찾아볼 수도 없다. 내가 나고 자란 옛 집도 이미 헐린지 오래여서 사진을 통해 어린 시절 내가 자라난 환경이 어땠는지를 희미하게 떠올릴 수 있을 뿐이다.

    자신이 나고 자란 집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 키가 얼마나 컸는지 문틀에 그어놓은 흔적이 그대로 있고, 지금은 돌아가신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안겨 재롱부리던 안방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자라난 동네에 돌아갔을 때 “누구 집 자식이구나”하고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다면 어떤 느낌일까?

    나도 자식을 낳고 나이가 중년에 접어들면서 과연 나는 나의 과거를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어린시절과 성장기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물건과 기록물을 계속 들고 다녀야 하는가? 나에게 의미있는 책과 사진과 취미 활동의 결과물은 보존할 가치가 과연 있는 것인가? 중고등학교 졸업장은 보존 가치가 있는 문화적 자원인가 아니면 삶을 옭아매는 굴레인가? 나의 존재가 시작된 뿌리를 기념해야 하는가, 아니면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과감하게 다음 단계로 발걸음을 옮겨야 하는가?

    뿌리에 대한 생각을 하다보니 1950년을 전후해서 급하게 북한에서 남한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기존의 삶의 터전을 버리고 내려왔기 때문에 남쪽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발판platform으로 삼아 생존을 도모했을까 궁금해졌다. 자신이 자라난 토대를 잃고 삶이 리셋되는, 눈 앞이 캄캄해지는 경험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피난민들이 자신들의 뿌리를 기념하기 위해 1950년 대 이전의 북한에서의 삶이 어땠는지를 보여주는 생활사 박물관을 세울 법도 한데 그런 것이 없는 이유 중 하나는 피난길에 많은 물건을 가지고 내려올 수 없었기 때문이라 생각할 수 있다. (한국전쟁 전후 북한 피난민들의 남한 정착 과정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가 분명히 있을텐데 찾아봐야겠다.)

    자신의 뿌리는 분명 소중한 것이지만 그 소중한 것을 자신의 의지로 포기해야 한다면 분명히 그것보다 더욱 소중한 무엇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강제 이주의 경우처럼, 타인에 의해 억지로 뿌리가 뽑히는 경우는 다른 이야기다.) 이곳을 버리는 이유는 저곳으로 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더 나은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현재 서있는 플랫폼을 불태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추억보다 더 나은 것이 있을 때 추억을 포기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나온 과거보다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상상에 마음이 빼앗기지 않은 사람은 과거에 집착하기 쉽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네가 고향을 찾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들이 만일 떠나온 곳을 생각하고 있었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은 더 좋은 곳을 동경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늘의 고향입니다.

    히브리서 11:14-16 (새번역)
  • 미래에 대하여 (On Future)

    인간은 미래에 대해 상상할 수 있을 뿐이지 결코 미래를 알 수는 없다.

    미래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예컨대 “나는 미래에 반드시 죽는다”라든지 “서울 기준으로 내일은 오전 7:40에 해가 뜬다”–은 실제로는 미래를 아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을 그렇게 표현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미래를 예측한다는 책은 실제로는 사람들이 현재에 대해 알고 있는 바를 정리한 것이고, 그런 면에서 나름대로 유용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책에서 미래에 대해 확정적으로 말하는 내용은 현재의 지식을 미래로 투사한 상상imagination일 따름임을 유념하면서 읽으면 된다.

    인간이 미래를 알 수는 없지만 세상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상상을 해보는 것은 좋은 정신적 훈련*이 된다. 미래를 알 수 없다고 가만히 있지 말고 다양한 상상을 해보자. SF 소설을 읽는 것도 도움이 된다.


    *복권 1등 당첨을 꿈꾸는 것은 막연한 기대wishing thinking이지만 당첨금(평균 세전 23억, 세후 15억원 정도라고 함)으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상상해 보는 것은 자신이 얼마나 기발한 생각out-of-the-box thinking을 할 수 있는지 연습할 수 있는 방법이다.

  • 책임감에 대하여 (On Responsibility)

    책임감이란 자신의 삶과 존재가 가치있는 것인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마음 속에서 작동하는 레이더 같은 것이다.

    영어 responsibility는 외부의 요청 신호에 응답할 수 있는지 여부를 말하는데, 모든 신호signal에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특정 신호에만 반응을 보인다. 즉, 책임감은 다양한 요청 신호 중에서 무엇을 자신에 대한 부름으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

    책임감의 범위와 방향은 사람에 따라 다 다르다. 자신을 중심으로해서 자신의 안위, 가족의 생계, 가까운 공동체의 복지, 자신이 소속된 지역이나 국가의 안녕 등을 도모하는 것을 책임감의 기본 방향으로 하고 그 범위를 자신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주변으로 좁게 한정하거나 혹은 아주 넓게 포용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책임감의 방향을 밖으로 돌려 자신과 직접적인 연관이 상대적으로 약한 타인의 행복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책임감을 완수하는 것은 인간이 가진 삶의 목적purpose 중 하나이고, 책임감 완수를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선정하는 것이 목표goal에 해당한다. 그 목표 달성을 위해 각자 채택하는 전략적 관점, 사용하는 수단과 과정process, 활용하는 자원, 선택과 평가의 기준이 사람마다 다 다르다.

    간혹 자신에게 재능이나 자원이 있지만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하는지 잘 모르고, 마음 속에 목표나 목적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을 경우가 있다. 혹자는 진로를 정할 때 ‘나는 무엇을 잘 하는가? 나는 무엇에 관심이 있는가?’를 참고로 하는 경우도 있지만, 위에서 말한 단계의 구조hierarchy를 염두에 두고 생각한다면, 우선 자신은 무엇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는지를 자문하고 그것을 기준점으로 삶의 방식을 재구성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한편, 책임감sense of responsibility와 의무감sense of duty은 살짝 다르다. 책임감은 스스로 느끼는 것이고 의무감은 타인으로부터 부여된 것이다. 다만 타인으로부터 자신에게 부여된 의무를 다하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느끼는 경우 의무감과 책임감을 사이의 경계선이 모호해 질 수 있다.

    또한, 자신의 책임감은 개개인에게 고유한 것이어서 자신의 책임감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타인에게 영향력을 줄 수는 있지만 본질적으로 남에게 전가transfer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은 자신의 가족의 생계와 안위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이를 우선순위에 두는 반면, 그의 배우자는 가족보다는 조직이나 공동체에 대해 더 깊은 책임감을 느껴 가족을 희생하더라도 대의를 추구하는 경우, 이로 인한 갈등은 불가피하지만 각자 느끼는 책임감의 차이에 대해서는 서로 존중할 수 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남의 책임감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책임감에 대해 본분을 다 하는 것이다. 남의 경기에 대해 관전평을 하는 해설자commentator가 아니라 직접 경기장에서 뛰는 선수player가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요한복음 19:30
  • 해법에 관하여

    흔히 아인슈타인의 명언이라고 회자되는 말 중에 아래와 같은 것이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문제들은 우리가 그 문제를 만들어냈을 때와 같은 수준의 사고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The significant problems we have cannot be solved at the same level of thinking with which we created them.

    Icarusfalling 블로그에 의하면 위의 인용문은 아인슈타인이 어떤 글에서 “새로운 종류의 사고방식이 필요하다”고 쓴 것을 후대의 사람들이 재해석해서 만들어낸 문장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러니까 아인슈타인이 위의 문장을 직접 말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

    어쨌거나 위의 문장이 “명언”으로 여러 사람에게 인용되는 이유는 납득될만한 요소가 어느 정도 들어있기 때문일텐데 위 명언을 다이어트에 적용하면 이렇게 된다:

    많이 먹어서 살이 찐 것이라면 적게 먹어서 살을 빼보겠다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한다.

    – a corollary to Einstein’s famous quote “The significant problems we have cannot be solved at the same level of thinking with which we created them.”

    많이 먹어서 찐 살을 빼려고 한다면 “먹는 양을 줄이면 된다”는 수준의 생각과는 다른 수준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제 밤에 많이 먹었으니까 오늘 아침은 굶고 점심은 조금만 먹어야지” 하는 생각으로는 결코 살이 빠지지 않는다.

    인과론적 사고 체계에서는 대체로 “원인이 있어서 이렇게 되었으니 그 원인을 제거하면 달라질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구두에 모래가 들어가서 걷기 불편한 경우 모래를 털어내면 문제가 해결된다.

    그러나 많은 고질적인 문제들(significant problems) 은 그런 식으로는 풀리지 않는다. 그 문제를 고질적으로 만드는 다양한 원인들이 여러 층위에 걸쳐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구두를 신고 모래사장을 걷고 있는 것이라면 모래를 털어내도 또 모래가 들어가 불편함이 반복되는 것처럼, 어떤 고질적인 문제를 만들어내는 구조적 필연성을 바꾸지 못하면 그 문제로부터 벗어나기 어렵다.

    이미 오래 전에 일본의 컨설턴트 오마에 겐이치(大前硏一)가 강조한 것처럼 근본적인 변화를 꾀하려면 의지만으로는 안 되고 시간, 장소, 관계와 같은 환경 요인을 바꿔야 한다. 특히 장소 변화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Dan Buettner의 The Blue Zones 라는 책에서 가르치는 내용이기도 하다.

    인간을 바꾸는 방법은 세 가지 뿐이다. 시간을 달리 쓰는 것, 사는 곳을 바꾸는 것,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것. 이 세 가지 방법이 아니면 인간은 바뀌지 않는다. ‘새로운 결심을 하는 것’은 가장 무의미한 행위다.

    오마에 겐이치

    새해를 맞아 습관을 바꿔보겠다고 결심을 했는데 실제로는 매해 동일한 결심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미 직접적 원인 제거만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고질적인 상황인 것이므로 전혀 다른 층위(레벨)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 “나는 사고뭉치였습니다“의 저자 토드 로즈 교수처럼 때로는 새로운 환경으로 이사를 가는 것이 큰 도움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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