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드프레스를 5.0으로 업그레이드했더니 기존 블로그 포스트 텍스트의 앞부분 일부가 사라져버리는 현상이 발생했다. 모든 포스트가 그런 것도 아니고 사라진 텍스트의 분량도 일정하지 않아서 도대체 어떤 이유로 사라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어떤 포스팅은 제목만 남기고 내용 전체가 사라진 경우도 있다. (예: 2015년 1월 15일자 포스팅 “obligation to write“)
과거 포스팅을 읽다가 내용이 왠지 어색하다면 문장 앞 부분이 사라져서 그런 것이다.
(그 외에도 문단이 합쳐진다거나 사진의 위치가 달라지는 등의 문제도 있지만 텍스트가 사라진 것에 비하면 약과다.)
과거의 백업 파일을 참조해서 일일히 복구할 수는 있겠지만 900개 가량의 포스팅을 하나씩 살펴가며 고치려니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작업 중에 한숨 돌리기 위해 차를 한 잔 마시는 것과 누군가를 만나 차 한 잔 하는 것은 마시는 행위는 비슷하지만 맥락이 크게 다르다.
혼자 마실 때는 어떻게 하든 상관이 없겠지만 다른 사람과 교제를 하는 맥락에서 차를 마실 때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형식과 작법(作法: 일정한 규칙)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런 작법은 문화권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일본, 중국, 영국, 한국 모두 차를 마시지만 차를 둘러싼 행동 규칙과 형식이 저마다 다르다. 심지어 찻잔을 드는 방식에도 각자의 특징이 존재한다. 예컨대 일본은 전통적으로 찻잔을 두 손으로 들어올리고, 영국은 한 손으로는 찻받침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찻잔을 드는 것이 매너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규칙은 해당 문화에 살아보지 않으면 좀처럼 알기 어렵다.
그러나 문화를 막론하고 대체로 “차 대접”이라는 형식의 공통점은 각자 알아서 타먹는 게 아니라 누군가 다른 사람이 타준다는 것이 그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카페에서는 바리스타가 그 일을 대신 해준다.)
그러니까 차 대접을 하면서 “알아서 내려드세요”, “커피는 셀프”하고 하면 일반적인 맥락에서는 굉장히 어색해진다. 식후에 식당에서 마시는 자판기 커피라고 할지라도 누군가가 받아서 쟁반에 갖다주면 그 느낌이 사뭇 다른 것이다.
“남이 타주는 행위”가 차 대접의 핵심이라고 한다면 대접 받는 사람이 특별히 유의해야 하는 점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차를 타서 내주는 사람의 행동 그 자체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가지는 한편 차의 맛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말아야 한다는 것. 물론 특별히 맛있는 차를 대접받는다면 그 점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말아야하지만 혹시라도 차가 입맛에 맞지 않더라도 차의 맛이 핵심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넷플릭스에 Brené Brown의 강연 The Call to Courage가 떴다고 해서 들어보았습니다. 그녀의 강연 중, 테어도어 루즈벨트의 말이 인용되고 있어서 그 본문을 공부삼아 우리말로 옮겨 보았습니다.
“It is not the critic who counts; not the man who points out how the strong man stumbles, or where the doer of deeds could have done them better. The credit belongs to the man who is actually in the arena, whose face is marred by dust and sweat and blood; who strives valiantly; who errs, who comes short again and again, because there is no effort without error and shortcoming; but who does actually strive to do the deeds; who knows great enthusiasms, the great devotions; who spends himself in a worthy cause; who at the best knows in the end the triumph of high achievement, and who at the worst, if he fails, at least fails while daring greatly, so that his place shall never be with those cold and timid souls who neither know victory nor defeat.”
Theodore Roosevelt (from his speech titled “Citizenship in a Republic,” April 23, 1910)
“남을 비평하는 사람들은 수에 칠 가치가 없습니다. 힘있는 사람의 실수를 지적이나 하고 실제로 일하는 사람들의 부족함을 들춰내기 급급한 사람들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 인정받아야 할 사람은 경기장 안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얼굴이 흙과 땀과 피에 절은 채 용맹스럽게 수고하는 바로 그 사람 말입니다. 그는 실수도 하고, 거듭 실패합니다. 모든 노력에는 실수와 부족함이 따르기 마련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는 실천을 위한 수고를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위대한 열정과 헌신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가치있는 명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마침내 그는 큰 성취의 영광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실패하더라도 적어도 그는 대담한 시도를 하다가 실패하는 것이기에 그는 승리도 패배도 알지 못하는 이 열정 없는 소인배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테오도어 루즈벨트 (1910년 4월 23일에 파리에서 이뤄진 연설 “공화국의 시민” 중에서)
중국어 Union Version도 우리말 순서와 같다. (1) 사람들이 내게 말했다 (2) 여호와의 전으로 가자 (3) 나는 기뻤다.
人对我说,我们往耶和华的殿去,我就欢喜。
诗篇 122 (Union Version)
궁금한 것은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이 세 단위의 순서가 과연 어떻게 되어 있을까 하는 것이다. 문장에는 두괄식도 있고 미괄식도 있는 것이니 맨 앞에 나오는 내용이 꼭 중요한 내용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번역본마다 이렇게 다르니 어쨌든 이 시의 저자는 세 단위 중 무엇을 맨 앞에 두었을지 궁금했다.
히브리어 성경 풀이를 참조해 보았더니 원문의 순서는 영어와 같았다. 즉, (1) 나는 기뻤다 (2) 사람들이 말했을 때 (3) 여호와의 집으로 가자.
원문처럼 “나는 기뻤다”를 맨 앞에 둔 것은 감정의 표현(expression)에 가깝고, 우리말 번역처럼 “나는 기뻤다”를 맨 뒤에 둔 것은 상황 설명(explanation)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히브리어 원문과 영어 번역에서는 “나는 기뻤다”라는 개인의 감정 표현이 먼저 언급되는 반면, 한국어, 일어, 중국어에서는 나의 감정보다 주변 사람들의 행동이 먼저 언급된다. 문화에 따라 개인의 감정과 주변의 상황 중에서 어느 쪽에 더 무게를 주는지가 번역의 차이에서 드러난다고 볼 수도 있을까?
번역시 문장 구조의 차이를 나타내는 또 하나의 예는 신약 마태복음 5장의 팔복의 경우. 우리말 번역은 (1) 어떠어떠한 자는 (2) 복이 있다 로 되어 있는 반면, 그리스어 및 영어 성경은 (1) 복되도다 (Blessed are…) (2) 어떠어떠한 자여 의 구조로 되어 있어 말의 순서가 주는 느낌이 미묘하게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