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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Soonuk Jung. The Carffing Cafe 1
©2019 Soonuk Jung. The Carffing Cafe 2

WordPress 5.0으로 업그레이드하면서 포스팅 앞부분 텍스트 일부가 없어지는 안타까운 일을 겪었지만 한 가지 긍정적인 것은 사진을 손쉽게 full-width로 올릴 수 있게 된 것.

위 사진은 경기도 용인시 기흥에 위치한 더 카핑 카페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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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와 칼

“서양인은 대개 인습에 반기를 들어 많은 장애를 극복하고 행복을 찾아가는 것을 강함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본인의 견해에 따르면 강자란 개인적인 행복을 버리고 의무를 좇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굳센 인격의 소유자인가 아닌가는 반항이 아닌 복종을 통해 드러난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루스 베네딕트 지음, 김승호 옮김, “국화와 칼: 일본 문화의 유형”(책만드는집 2017), pp238-239.

1944년, 일본과 전쟁을 한참 치르던 중인 미국 정부는 차후 일본을 점령하고 다스릴 것을 예상하고, 일본인을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 인류학자인 루스 베네딕트에게 일본인 연구를 맡긴다. 일본에 가보지도 못한 그녀가 작성하여 1946년에 발간된 책 “국화와 칼”의 명성을 오래 들어오다 마침내 읽게 되었다.

영어는 꽤 난해해서 포기하고, 비교적 최근에 다시 나온 번역본(김승호 옮김, 책만드는집 2017)으로 읽는 중. 번역이 매끄러워 훨씬 읽기가 수월하다.

이 책에서 인용하는, 1830년대에 쓰인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미국 연구서 <<미국의 민주주의>>를 통해, 미국 문화 역시 유럽의 문화와는 다른, 특이한 면모가 있었다는 점을 알게 되는 점도 매우 흥미롭다. 계층적 사회를 이루던 유럽인에게는 당시 미국의 평등한 문화가 매우 독특하게 보였다고 한다. 그런 미국인이 보는 일본의 계층적 문화 또한 매우 이질적이었다.

일본인 입장에서 본 일본 문화 연구서인, 야마모토 시치헤이 지음 <<공기의 연구>>도 재미있지만, 미국인 관점에서 본 일본 문화 연구도 무척 흥미롭다.

미국과 일본 간의 문화 비교 연구가 타산지석이 되어 한국 문화 이해에 참고가 된다. 특히 “자유”와 “평등”이라는 개념이 한국의 전통적 관점에서는 매우 낯선 것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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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ody keeps the score

“또한 의사들이 환자들이 이룬 성과와 그들이 가진 열망, 마음을 쓰고 사랑하는 대상이나 증오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또 무엇이 환자의 행동에 동기를 부여하고 행동을 이끌어 내는지, 무엇이 환자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고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평온함을 느끼게 하는지, 즉 환자의 삶의 생태에 관심을 거의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베셀 반 데어 콜크 지음, 제효영 옮김, <<몸은 기억한다>>(을유문화사 2016) 원제: The Body Keeps the Score, p58

위의 글은 책의 저자가 젊은 시절, 정신과 병동에서 일하면서 관찰한 의사들의 행동에 관한 기술이다. 당시 연구 보조 역할을 맡았던 저자는 병원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 잠을 이루지 못하는 정신 병동 환자들이 한 밤 중에 나와 자기 사연–주로 트라우마–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기회가 많았다. 그런 한편, 대체로 환자와의 접촉 시간이 짧은 의사들은 환자들의 사연에 대해 별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이 의아하게 느껴졌다는 점에 대해 적은 것이다.

대체로 의사들은 질환의 치료를 위해 확인 가능한, 구체적 증상에 관심이 있으므로 환자가 넋두리처럼 이야기하는 속사정에 귀를 기울이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으리라는 점은 이해가 간다. 겉으로 드러난 증상을 파악하기도 어려운 마당에 잠재된 원인을 파헤치고 증상과의 인과 관계를 연결하려는 시도가 벅찰 수도 있으니까.

마찬가지로, 학부모의 관심이 “특정 대학 합격”이라는 결과에 지나치게 몰입되는 경우, 자녀의 일상적 감정이 어떤지, 아이의 열정이나 관심의 대상이 무엇인지, 대인관계에서 어떤 고민이 있는지 따위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닐 수 있다. “지금 그런 거 신경 쓸 때야? 그런 고민은 대학 가고 나서 해!”라고 윽박지르는 부모의 다그침은 치열한 경쟁의 현실이 빤히 눈에 보이는 부모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일리 있는 말이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시기 한가운데에 있는 십대 자녀에게는 인생에 대한 환멸을 느낄만큼 가혹한 표현으로 들릴 수 있다.

특별한 계기가 없다면 인간이 세상을 보는 관점은 잘 바뀌지 않는다. 따라서 “특정 대학 합격”이라는 목표에 최고의 가치를 이미 부여해 버린 부모를 납득시켜 그들의 관점과 행동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낮다. 대체로 그런 부모는 집요하게 따라 붙는 열 추적 미사일처럼, 대학 입학의 목표가 달성되거나 혹은 애당초 그 목표 자체가 무리였음이 확인될 때까지는 끊임 없이 자녀를 압박하고 추동하는(밀어붙이는) 언행을 멈추지 않으리라 예상된다. 안타깝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이런 부모의 가혹한 압박이 마음에 상처를 주기는 하겠지만, 이런 풍상(風霜)을 견디고 극복하는 삶의 선택은 여전히 자녀 각자의 몫이다. 부모가 원망스러울 수는 있겠지만, 인간의 삶은 어떤 형태로든 시련을 맞기 마련이므로, 남을 탓하며 주저 앉기 보다, 그리고 무기력하게 떠밀려 가기 보다,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이 가야 하는 좁은 길–옳은 길–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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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의 취향

살아오면서 좋아하게 된 음악이 얼마간 있는데, 그 중 일부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Astor Piazzolla, Four Seasons of Buenos Aires (Cuatro Estaciones Porteñas)
Sergei Rachmaninoff, Piano Concertos No. 2
Ludwig van Beethoven, Symphony No. 7, Mov. 2 (Allegretto)

잠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 보았는데, 내 장례식장에 좋은 앰프와 스피커를 설치해서 위와 같은 음악을 계속 틀어놓으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물론 당사자(나)는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망자를 위해 틀어주는 것은 아니고 ‘고인은 이런 음악을 좋아하셨습니다’라고 조문객들에게 고인의 취향을 공유하는 것이다.

아주 나쁜 생각은 아닌 것 같지만, 음악적 취향은 대체로 개인적인 것이어서 내가 좋아한다고 다른 사람들도 꼭 마음에 들어하리라는 법은 없으니 괜히 남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말하자면, 조문을 갔는데 배경음악으로 예컨대 홍진영의 “잘가라”나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라트라비아타 중 “축배의 노래”가 흘러나오면 아무리 그것이 고인의 애청곡이었다고 해도 “이게 아닌데”하며 언짢아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사후에 자기 취향을 남에게 강요하기 보다 살아 있을 때 자기나 실컷 듣는 것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