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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rt of Wishing Well

인사의 기술

나는 십대 시절부터 “메리 크리스마스!”, “생일 축하합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등의 인사말이 줄곧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런 인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입을 다물고 있다가 결국은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얼버무리곤 했다.

그나마 몇 년 전, 우치다 타츠루의 글을 통해, 인사말이라고 하는 것은 언어적 표현 그 자체에는 원래 아무 의미가 없고, 단지 상대에게 좋은 일이 있기를 바란다는 제스쳐를 주고 받는 행위가 인류 공통의 의식(ritual)으로 자리잡은 것이라고 배운 덕분에 지금은 덜 어색한 마음으로 인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약간 불편함을 느끼는 인사말 중 하나는 “안부를 전해주세요”라는 표현. 통신과 여행이 쉽지 않았던 과거에는 전달자를 통하지 않으면 인사를 전할 방법이 달리 없었으므로 이런 간접 인사가 의미가 있었지만, 오늘날은 직접 안부를 묻는 것이 적어도 기술적으로는 어렵지 않으므로 이 표현의 맥락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만약 직접 마주하여 인사를 하기에는 약간 어색한, 아주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관계라면 중개자를 통한 인사가 가능할 수 있는 한편, 어떻게 보면 중재 역할을 하는 사람에게 암묵적으로 ‘나를 홍보해 주세요’라는 부담을 지우는 것 같다는 의구심도 든다.

특히 나는 기억력이 나쁘기 때문에 “식구들에게 안부 전해 주세요”라는 부탁을 받으면 ‘분명 잊어버릴텐데’하는 부담감과 죄책감이 동시에 들어 마음이 불편해진다. 그래서 그런 부탁을 받을 경우 그저 식구들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는 인사말로 해석해서 고맙다고 하고 바로 잊어버린다.

문제를 제기했으면 뭔가 대안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서, 제3자를 경유한 안부 인사 전달의 실질적인 대안을 생각해 보았다:

  1. 작은 선물을 준비한다: “식구들에게 안부를 전해 주세요”라고 하기 보다 “작은 선물을 준비했는데 아이들에게 전해 주실래요?”라고 하는 편이 훨씬 더 실질적이다. (단, 선물을 받으면 반드시 되갚아야 한다는 의무감이 발생하는 문화권에서는 이런 호의가 오히려 폐가 될 수 있으므로 주의와 분별이 필요하다.)
  2. 축복의 말을 중개인에게 바로 말한다: 인사말을 전달해 달라고 간접적으로 표현하기 보다 “부인과 아이들이 앞으로도 계속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관계의 매개가 되는 상대에게 직접 이야기해도 그 인사의 취지는 전달된다.
  3. 직접 메시지를 전한다: 중개인이 동의한다면 연락처를 얻어 “안녕? 난 너희 아빠 친구인데 신세를 많이 지고 있지. 아빠가 너희들을 무척 자랑스러워 하시더구나. 새해 복많이 받아라!” 등의 메시지를 문자나 이메일, 혹은 편지 등으로 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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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와 칼

“서양인은 대개 인습에 반기를 들어 많은 장애를 극복하고 행복을 찾아가는 것을 강함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본인의 견해에 따르면 강자란 개인적인 행복을 버리고 의무를 좇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굳센 인격의 소유자인가 아닌가는 반항이 아닌 복종을 통해 드러난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루스 베네딕트 지음, 김승호 옮김, “국화와 칼: 일본 문화의 유형”(책만드는집 2017), pp238-239.

1944년, 일본과 전쟁을 한참 치르던 중인 미국 정부는 차후 일본을 점령하고 다스릴 것을 예상하고, 일본인을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 인류학자인 루스 베네딕트에게 일본인 연구를 맡긴다. 일본에 가보지도 못한 그녀가 작성하여 1946년에 발간된 책 “국화와 칼”의 명성을 오래 들어오다 마침내 읽게 되었다.

영어는 꽤 난해해서 포기하고, 비교적 최근에 다시 나온 번역본(김승호 옮김, 책만드는집 2017)으로 읽는 중. 번역이 매끄러워 훨씬 읽기가 수월하다.

이 책에서 인용하는, 1830년대에 쓰인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미국 연구서 <<미국의 민주주의>>를 통해, 미국 문화 역시 유럽의 문화와는 다른, 특이한 면모가 있었다는 점을 알게 되는 점도 매우 흥미롭다. 계층적 사회를 이루던 유럽인에게는 당시 미국의 평등한 문화가 매우 독특하게 보였다고 한다. 그런 미국인이 보는 일본의 계층적 문화 또한 매우 이질적이었다.

일본인 입장에서 본 일본 문화 연구서인, 야마모토 시치헤이 지음 <<공기의 연구>>도 재미있지만, 미국인 관점에서 본 일본 문화 연구도 무척 흥미롭다.

미국과 일본 간의 문화 비교 연구가 타산지석이 되어 한국 문화 이해에 참고가 된다. 특히 “자유”와 “평등”이라는 개념이 한국의 전통적 관점에서는 매우 낯선 것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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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ody keeps the score

“또한 의사들이 환자들이 이룬 성과와 그들이 가진 열망, 마음을 쓰고 사랑하는 대상이나 증오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또 무엇이 환자의 행동에 동기를 부여하고 행동을 이끌어 내는지, 무엇이 환자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고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평온함을 느끼게 하는지, 즉 환자의 삶의 생태에 관심을 거의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베셀 반 데어 콜크 지음, 제효영 옮김, <<몸은 기억한다>>(을유문화사 2016) 원제: The Body Keeps the Score, p58

위의 글은 책의 저자가 젊은 시절, 정신과 병동에서 일하면서 관찰한 의사들의 행동에 관한 기술이다. 당시 연구 보조 역할을 맡았던 저자는 병원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 잠을 이루지 못하는 정신 병동 환자들이 한 밤 중에 나와 자기 사연–주로 트라우마–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기회가 많았다. 그런 한편, 대체로 환자와의 접촉 시간이 짧은 의사들은 환자들의 사연에 대해 별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이 의아하게 느껴졌다는 점에 대해 적은 것이다.

대체로 의사들은 질환의 치료를 위해 확인 가능한, 구체적 증상에 관심이 있으므로 환자가 넋두리처럼 이야기하는 속사정에 귀를 기울이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으리라는 점은 이해가 간다. 겉으로 드러난 증상을 파악하기도 어려운 마당에 잠재된 원인을 파헤치고 증상과의 인과 관계를 연결하려는 시도가 벅찰 수도 있으니까.

마찬가지로, 학부모의 관심이 “특정 대학 합격”이라는 결과에 지나치게 몰입되는 경우, 자녀의 일상적 감정이 어떤지, 아이의 열정이나 관심의 대상이 무엇인지, 대인관계에서 어떤 고민이 있는지 따위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닐 수 있다. “지금 그런 거 신경 쓸 때야? 그런 고민은 대학 가고 나서 해!”라고 윽박지르는 부모의 다그침은 치열한 경쟁의 현실이 빤히 눈에 보이는 부모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일리 있는 말이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시기 한가운데에 있는 십대 자녀에게는 인생에 대한 환멸을 느낄만큼 가혹한 표현으로 들릴 수 있다.

특별한 계기가 없다면 인간이 세상을 보는 관점은 잘 바뀌지 않는다. 따라서 “특정 대학 합격”이라는 목표에 최고의 가치를 이미 부여해 버린 부모를 납득시켜 그들의 관점과 행동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낮다. 대체로 그런 부모는 집요하게 따라 붙는 열 추적 미사일처럼, 대학 입학의 목표가 달성되거나 혹은 애당초 그 목표 자체가 무리였음이 확인될 때까지는 끊임 없이 자녀를 압박하고 추동하는(밀어붙이는) 언행을 멈추지 않으리라 예상된다. 안타깝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이런 부모의 가혹한 압박이 마음에 상처를 주기는 하겠지만, 이런 풍상(風霜)을 견디고 극복하는 삶의 선택은 여전히 자녀 각자의 몫이다. 부모가 원망스러울 수는 있겠지만, 인간의 삶은 어떤 형태로든 시련을 맞기 마련이므로, 남을 탓하며 주저 앉기 보다, 그리고 무기력하게 떠밀려 가기 보다,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이 가야 하는 좁은 길–옳은 길–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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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ion-Oriented Figure

에니어그램 9번 “평화주의자” 유형에 가까운 나는 갈등과 충돌을 회피하기 위해 각종 위험 요인에 대해 안전거리를 유지하고, 함부로 위험스런 일에 도전하지 않는 것을 삶의 지침으로 하고 있다. 그럭저럭, 무난한, 별일 없는 일상을 선호하는 것이다.

2-3년 전, Love Does라는 책을 통해 Bob Goff라는 인물을 알게 되었는데 이 사람은 에니어그램 7번 “열정가” 유형으로서, 나와는 정반대 성격의 소유자다. 뭔가 생각이 떠오르면 그걸 행동으로 옮기는 속도가 매우 빠르다. 그래서 “목록을 만들 시간이 있으면 전화부터 돌려라”라고 말한다.

“Don’t make a list, make a call.”

Bob Goff

그런 도전에 따르는 실패와 역경에 대해서도 당연하다는 태도로,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다. 보통 사람 같으면 무서워 긴장할만한 일에 대해서도 “신난다(Terrific)”고 하면서 껄껄 웃는, 그런 사람이다. 동영상을 보면 표정과 제스처에서 그의 개방성이 느껴진다.

Bob Goff가 최근 Dream Big 이라는 제목의 팟캐스트를 시작했다. 그의 지인과의 대담 형식으로 진행되는 팟캐스트인데, 들으면서 느끼는 것은 이 사람이 사용하는 단어와 표현이 매우 행동지향적이라는 것. 위험 회피 성향이 강한 내가 꼭 들어야 할 것 같아서 구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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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Books in 2019

2019년에 읽은 책을 기록해둡니다. 단, 읽다가 중단한 책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읽은 책을 기록하면서 느끼는 점은 매달 깊은 인상을 받은 책은 그 전 달만 해도 생각도 못했던 책이라는 점입니다. 정말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인가 봅니다.

1월

  1. 마이크 미칼로위츠 지음, 윤동준 옮김, 수익 먼저 생각하라
  2. Greg Crabtree, Simple Numbers, Straight Talk, Big Profits (Kindle)
  3. David Green, Giving It All Away and Getting It All Back Again (audiobook)
  4. 다이 시지에,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
  5. Nicholas Nassim Taleb, Skin in the Game (audiobook)
  6. Albert-Laszlo Barabasi, The Formula (audiobook)
  7. 우치다 타츠루 지음, 이지수 옮김, 거리의 현대사상
  8. 우치다 타츠루, 이지수 옮김, 말하기 힘든 것에 대해 말하기

2월

  1. 한기정, 셰익스피어를 읽자
  2. 곤도 마리에, 곤마리 씨, 우리 집 좀 정리해 주세요
  3. Eric Barker, Barking Up the Wrong Tree (audible)
  4. 岩井克人(이와이 카츠히토) 지음, ヴェニスの商人の資本論
  5. Jack Stack, The Great Game of Business
  6. 테라오 겐, 가자, 어디에도 없었던 방법으로
  7. 야마모토 시치헤이 지음, 박용민 옮김, 공기의 연구
  8. 야마모토 시치헤이 지음, 이서현 옮김, 지혜의 발견
  9. 후지노 요시코(藤野嘉子), 60歲からは「小さくする」暮らし
  10. 이와쿠라 신야, 이와타니 마사키, 나가사와 신야 지음, 박미옥 옮김, 혼다 디자인 경영

3월

  1. 윤광준, 심미안 수업
  2. 임홍택, 90년생이 온다
  3. Michael Bond, A Bear Called Paddington
  4. Neil Hayes, Chasing Perfection
  5. Neil Hayes, When the Games Stand Tall
  6. 채사장,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7. 일본하우스클리닝협회, 청소해부도감
  8. Cal Newport, Digital Minimalism
  9. 김홍섭, 무상을 넘어서
  10. Mike Michalowicz, Clockwork: Design Your Business to Run Itself
  11. 다나카 나오키, 나는 당신이 오래오래 걸었으면 좋겠습니다
  12. 오카 기요시, 수학자의 공부
  13. 블레이크 스나이더 지음, 이태선 옮김, “Save the Cat! 모든 영화 시나리오에 숨겨진 비밀” 
  14. 마릴린 폴 지음, 김태훈 옮김, 일하지 않는 시간의 힘

4월

  1. 야마모토 시치헤이 지음, 김승일, 이근원 옮김, 일본 자본주의의 정신 (범우사)
  2. 신동흔 지음, 모스에서 잡스까지
  3. 우치다 타츠루, 소통하는 신체
  4. 로잔 토머스 지음, 서메리 옮김, 태도의 품격
  5. 야마모토 시치헤이 지음, 고경문 옮김, 일본인이란 무엇인가
  6. Amy Cuddy, Presence
  7. 마쓰우라 야타로 지음, 최윤영 옮김, 나만의 기본
  8.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나는 길들지 않는다 (바다출판사 2014)
  9. 봉달호 지음, 매일 갑니다, 편의점 (시공사 2018)
  10. 정경오 지음, 행여 공부를 하려거든 (양철북 2018)
  11. 요시타카 신스케 지음, 고향옥 옮김, 있으려나 서점 (온다 2018)
  12. 야마모토 시치헤이 지음, 이서현 옮김, 지혜의 발견 (모시는사람들 2018)
  13. 이용찬 지음, 이 공식을 모르면 PT하지 마라 (마일스톤 2018)
  14. 신성대 지음, 자기 가치를 높이는 고품격 매너 (동문선 2016)

5월

  1. Priya Parker, The Art of Gathering
  2. 스가쓰케 마사노부 편저, 현선 옮김, 앞으로의 교양
  3. 대런 애쓰모글루, 제임스 A. 로빈슨 지음, 최완규 옮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시공사)
  4. 마쓰우라 야타로, 최저 최고의 서점
  5. 셀레스트 헤들리 지음, 김성환 옮김, 말센스
  6. 신성대 지음, 나는 대한민국이 아프다, 동문선
  7. Emily P. Freeman, The Next Right Thing

6월

  1. David Brooks, The Second Mountain
  2. Simon Sinek, Start with Why
  3. Brené Brown, The Gifts of Imperfection
  4. 제프리 웨스트 지음, 이한음 옮김, 스케일 (김영사 2018)
  5. 리처드 윈터 지음, 김동규 옮김, 지친 완벽주의자를 위하여 (IVP 2007)
  6. 이소벨 쿤 지음, 정병은 옮김, 가무는 해에도 청청한 잎 (전도출판사 2004)
  7. 김정선 지음,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유유 2016)

7월 (예정)

  1. 야마구치 슈 지음, 김윤경 옮김,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다산초당 2019)
  2. Alden Mills, Unstoppable Teams
  3. Steven D. Levitt & Stephen J. Dubner, Think Like a Fre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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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와 비밀

일본 작가 우치다 타츠루의 2019년 3월 31일자 블로그 포스팅 “헌법에 대하여“에서, 일본인 중 태평양전쟁에 직접 참여했던 세대의 사람들 대부분은 패전 후 그 전쟁 중의 경험이 실제적으로 어떠했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일절 삼가고 침묵으로 일관했다고 적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자기들의 전쟁 책임을 회피하려는 이기적인 동기도 있었겠지만 그보다 더 강한 동기로서 전후에 자라나는 어린이들은 과거의 일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채, 순진무구함을 간직하며 자라나도록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으리라고 해석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자기들의 윗 세대에서 시작하고 국민 전체가 집단으로 참여한 태평양 전쟁에 대해, 이를 역사적 현실로서 인지는 하되 차마 언급하기는 곤란한 문화적 금기로 받아들인 것이다. 즉, “우리 모두 전쟁에 대해서는 입을 꽉 다물고 있기로 합시다”라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분위기를 파악하여 그런 방향으로 암묵적인 동의를 일사천리로 진행한 셈이다.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에 대해 말하지 않기로 국가적 차원의 암묵적인 합의가 자리잡은 것이 일본의 현실이라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이 태평양 전쟁 중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일본인들은 강력한 자기부정(self-denial)의 인지적 속박에 얽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집을 피울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심리적 교착 상태에 빠진 집단을 상대하는 경우에는 “너희 조상들의 과오를 순순히 인정해라”라고 정면으로 도전하기 보다 “불행한 과거에 대해 차마 뭐라고 말을 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이해한다”는 것을 전제로 교묘하게 우회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실질적 결과를 얻기에 보다 효과적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같은 포스팅 글에서 우치다 타츠루는 1946년에 제정된 일본 평화 헌법이 생겨난 과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그 구체적인 정황에 대해 대체로 함구하는 현상이 있다고 지적한다. 일본의 헌법은 일본인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미군정 하에서 부여된 것이기에 그 탄생의 과정에 대해 부끄럽게 느낀 나머지 차라리 침묵하기로 한 것인지도 모른다.

해당 부분을 읽다가 문득 생각이 난 것인데, 대체로 사람은 자신이 태어난 구체적인 과정에 대해 부모로부터 자세하게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좀처럼 없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다. 실제로 부모가 아이로부터 “나는 어떻게 태어났어요?” 혹은 “아기는 어떻게 태어나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무척 당혹스러워 하고, 대체로 각색되거나 순화된 형태의 모호한 답변을 내놓는다. 아이의 탄생으로 이어진 부모 사이의 접촉이 일어난 구체적인 장소와 시간, 그리고 당시의 분위기, 느낌, 과정에 대해서 부모가 어느 정도는 기억하고 있겠지만 그런 사실적인 정보를 있는 그대로 자녀에게 전달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탄생에 관한 이야기는 아이들이 너무 자세히는 알지 못하는 것이 낫다고 많은 사람들이 은연 중에 생각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이에 대한 하나의 가설은 다음과 같다. 생명의 탄생은 본질적으로 신비에 속한다. 어떤 입력 신호가 있고 그 당연한 결과로 산출물이 나오는 제조 프로세스와 같은 것이 아니다. 낳고 싶다고 반드시 아기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전혀 예상치 못하게 아기가 생기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새로운 생명의 탄생으로 이어진 구체적인 과정이 있더라도 그 과정은 필요 조건은 될 수 있어도 충분 조건은 아닌 것이다. 생명의 탄생의 과정을 어렴풋하고 비밀스럽게 감춰둠으로서 그 신비스러움을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하다고 은연 중에 많은 이들이 동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물론 일본이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의 부끄러운 역사를 가급적 덮어두려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맥락이다.


*조금 다른 이야기일 수 있지만, 전쟁이나 학살 현장을 실제로 경험한 사람은 당시의 이야기를 쉽게 꺼내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들의 무거운 침묵 속에는 당시의 피해자들에 대한 미안함과 그들의 희생에 대한 경외감 같은 것이 담겨 있는 듯 하다. 금기와 비밀에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는가 보다.

** 부끄러운 과거에 대해 함구하는 현상은 일본 뿐만 아니라 프랑스에도 있었다고 우치다 타츠루는 쓰고 있다. 2차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의 비시(Vichy) 정부는 나치 정부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전력이 있는데 이에 대해 프랑스인들은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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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good game

최근에 리더십을 주제로 다룬 두 영화를 인상깊게 봐서 그 이야기를 적으려고 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151경기>(원제: When the Game Stands Tall)에서 De La Salle 고등학교 미식축구팀의 코치 밥 라두서(Bob Ladouceur)는 151 경기 연승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운 팀을 이끌면서도 자기들은 이기기 위해 경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연신 강조한다. 이런 아이러니를 보면서 여러가지 고민을 하게 되었다.

이기기 위함이 아니라면 무엇을 위해 경기에 임하는가?

1976년 영화 <꼴찌 야구단>(원제: Bad News Bears)에서 리틀리그 어린이 야구단의 코치 모리스 버터메이커는 형편 없는 팀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월등한 실력을 가진 스타 플레이어를 기용한다. 그 과정에서 팀의 승리에 집착한 나머지 스타 플레이어의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결국 구성원의 의욕과 결집력을 망가뜨린다.

결국 이기기 위해 경기하는 것이 맞다면 버터메이커 코치의 선택은 합당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버터메이커 코치가 원한 팀의 승리는 결국 자기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입증하고자 하는 자존감 욕구와 긴밀하게 맞물려 서로 구분하기 어렵게 되어버렸다. (“엄마가 다 너 잘 되라고 공부하라는 거야”라는 전형적인 멘트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또한 경기에서의 승리라는 결과에 집착한나머지 선수들의 감성적인 필요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귀를 막아 버려 팀의 위기를 자초한다. 탐욕에 눈이 어두워지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 자체를 상실한다.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네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

마태복음 6:23 (새번역)

<151경기>에서 밥 라두서 코치는 선수들의 인격적 성숙을 도와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갔을 때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내보내는 것이 자신이 고등학교 미식축구팀을 지도하는 목적이라고 하면서 경기에서의 승리는 그 과정에서 얻어지는 부산물에 불과하다고 강조한다.

밥 라두서 코치가 지도하는 선수 중 한 명이 중요한 시합을 앞두고 “팀원들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기 위해 경기장에서 죽을 각오로 뛰겠다”라고 결의에 찬 다짐을 말하자, 라두서 코치가 말한다. “죽을 필요는 없어. 지쳐 쓰러지는 정도면 돼. 고작 고등학교 미식축구 경기일 뿐이야.” (이와는 대조적으로 <꼴찌 야구단>에서 주인공 팀의 상대편 팀 코치는 결승전을 앞둔 선수들에게 “만약 이 시합에서 진다면 너희들 모두 평생 후회하게 될꺼야”라고 으름짱을 놓는다. )

스포츠 시합에서는 이기는 팀이 있으면 반드시 지는 팀도 있기 때문에 승리만이 절대적이고 패배는 끝이라고 보면 곤란하다. 경기에서 이기는 것 그 자체보다 좋은 경기(a good game)을 펼치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경기란 최선을 다해 준비해 힘껏 싸웠지만 혹시 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 경기에 참가해 자신이 성장하고 변화해서 보람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경기다.

이 두 영화를 보면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 경기에 임하고, 무엇을 위해 경쟁하는 것인지 계속 생각하게 되었다. “돈 벌려고 장사하는 것”이고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라는 단기적 표적 이상의 목적과 이유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맥락은 약간 다르지만 The Great Game of Business 라는 경영서의 저자 Jack Stack은 비즈니스를 일종의 스포츠 경기처럼 바라보면서 직원들의 참여를 독려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비즈니스 조직이 성과를 내려면 비즈니스가 어떻게 운영되는지에 대한 게임의 규칙을 구성원 모두가 알아야하며 서로의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고 보았다. 특히 회계 자료를 정확하게 집계하여 구성원 모두에게 공개하여 비즈니스를 둘러싼 상황에 대해 즉각적인 대응이 가능하도록 했다. 사업에 참여하는 모든 구성원에게 보람이 있는 그런 비즈니스를 만들려고 했고 동시에 좋은 성과를 거뒀다. (참고: GreatGame.com)

경기에 나서는 사람은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썩어 없어질 월계관을 얻으려고 절제를 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썩지 않을 월계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9:25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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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Your Wife

We sometimes need reminders to do the most obvious thing:

In this same way, husbands ought to love their wives as their own bodies. He who loves his wife loves himself.

Ephesians 5:28 (NIV)

이와 같이, 남편도 아내를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곧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28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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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크 스나이더, Save the Cat! Goes to the Movies

나는 영화를 좋아하지만 영화를 보는 시간이 아까워서 잘 보지 못하는 편이다. 그 시간에 차라리 책을 읽는 게 낫다고 생각되어 미루고 미루다가 관심있는 영화가 개봉된 지 한참이 지난 다음에서야 온라인으로 보거나 아니면 그냥 잊어버린다.

블레이크 스나이더 지음, 이태선 옮김, “Save the Cat! 모든 영화 시나리오에 숨겨진 비밀” (비즈앤비즈 2018)는 나같은 사람에게 딱 맞는 책이다. 영화 시나리오 작가인 저자가 50편의 영화 줄거리 구조를 분석해 장르별로 정리한 것이 이 책. 특히 스토리텔링 기술의 관점에서 글을 적고 있어서 재미도 있지만 유익하기도 하다.

예컨대 꽤 오래 전(1987)에 나온 영화, 마이클 더글라스, 글렌 클로즈 주연의 <위험한 정사(Fatal Attraction)>는 관심은 있었지만 결국 보지 못했는데 마침내 이 책을 통해 핵심 주제와 줄거리를 파악할 수 있었다.

마이클이 와인 한잔하자는 글렌의 제안에 넘어간 순간부터 이미 바람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나와 영화를 같이 본 여자들이 마이클이 글렌과 점심을 함께 먹는 장면에서부터 “저 나쁜 새끼!”라고 욕을 해댔기 때문이다.

블레이크 스나이더 지음, 이태선 옮김, “Save the Cat! 모든 영화 시나리오에 숨겨진 비밀” (비즈앤비즈 2018) p37

한편, 국내에는 오래된 영화를 VOD로 제공하는 매체가 잘 없어서 이 책에서 소개된 몇몇 영화–예컨대 <꼴찌 야구단(Bad News Bears)>(1976)나 피터 셀러스 주연의 <찬스(Being There)>(1979)–를 보기 어렵다는 점이 아쉽다.


*참고: 아래 사이트에서 몇몇 영화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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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두기, 선긋기, 몰아내기

SL단순한일상이라는 계정의 유튜브 동영상 “작은 집 홈투어, 미니멀 라이프”을 보았다.

티 하나 없이 깨끗이 정리된 거실, 주방, 화장실, 수납장의 모습이 인상적이긴 했지만 뭔가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머리 속에 맴돌았는데 잠시 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이웃집 토토로” 가 생각났다.

이웃집 토토로“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커다란, 너구리와 고양이 모습을 한 존재들, 오래된 집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와 떠다니는 곰팡이균을 연상시키는 시커먼 먼지 등이 등장한다. 주인공 어린 아이들은 이런 기이(奇異)한–기묘하고 다른–존재들과 어느 정도의 긴장감 속에서 함께 지낸다. 이들과 동일시되지도 않고 적극적으로 소통하지도 않지만 그냥 주변에서 같이 지낸다. 어린 시절의 친구 관계라는 것이 흔히 그렇듯이, 서로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기 보다는 그저 같은 공간에서 함께 지내는 것에 대해 조금씩 익숙해져서 옆(“となり”)에 있어도 괜찮은 관계가 되어 간다. “이웃집 토토로”는 어린 시절에는 자신과는 이질적인 존재와의 공존이 상대적으로 용이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어린 시절에는 거리두기, 선긋기, 몰아내기 등의 방어적 행동이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는 취약성(vulnerability)이라는 특성이 따라다닌다. 부모가 “보호자(protector)” 역할을 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거리두기, 선긋기, 몰아내기 등은 경계선(boundary) 형성에 필요하지만 주변과의 단절을 가져올 정도로 지나치게 경계선을 지키면 고립된다. 따라서 건강하고 적절한 수준, 딱 필요한 만큼의 경계선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면역력이 없으면 격리가 필요하지만 면역력이 생기면 건강을 유지하면서 공존할 수 있게 된다. 이질적인 것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청소, 군더더기 없는 미니멀한 생활 환경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미니멀리즘은 간헐적 단식처럼 단기적으로 실험적인 시도는 될 수 있어도 장기적인 지속성은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결국 어느 정도의 복잡함과 지저분함 속에서도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