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thoughts

  • 공간의 이해

    아무리 노력해도 수납이 잘 안 되고 계속 집안이 어질러지는 이유가 뭘까? 스즈키 노부히로 지음, 황선종 옮김, “주거 정리 해부도감“(더숲)은 건축의 관점에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다시 말해 집안이 지저분한 이유는 집을 설계한 사람이 필요한 수납 공간을 감안한 설계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한다.

    “아무리 치우고 청소를 해도 금세 다시 집이 너저분해진다면, 그것은 당신 책임이 아닙니다. 집을 설계한 사람의 책임입니다. 설계도를 그릴 때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깜박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쉽게 정리를 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 스즈키 노부히로 지음, 황선종 옮김, “주거 정리 해부도감“(더숲), p5

    기존의 정리 관련 서적이 주로 버림, 청소, 수납에 집중한 것과 대조적으로, 이 책은 사용자와 사물의 직접적인 상호작용의 차원을 벗어나 건축설계의 관점에서 수납의 현상을 설명한다. 읽으면서 마치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주인공이 5차원 공간으로 들어가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현재”를 들여다보는 느낌이 들었다.

    집안의 수납공간을 도시의 주차공간에 빗대어 설명하는 저자의 절묘하고도 친절한 스토리텔링과 유머스러운 삽화는 읽는 즐거움을 더한다. “해부도감” 시리즈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다. 추천. (원서 링크: 鈴木信弘, 片づけの解剖図鑑) 뒤이어 다카하시 데쓰시 지음, 황선홍 옮김, “가게 해부도감“을 읽기 시작했다. 앞의 책 “주거 정리 해부도감” 만큼의 감동은 없지만 공간의 경험을 “연출”이라는 관점에서 풀어내는 내용이 흥미롭다. (원서 링크: 高橋 哲史, お店の解剖図鑑)

    “가령 음식점이라면 맛, 메뉴, 가격, 운영방침, 사장의 인품이나 고객의 특징, 입지 상황, 직원의 용모 등 다양한 요소가 뒤섞여 가게의 분위기를 만들어갑니다. 이 모두가 콘셉트를 한층 잘 전달하기 위한 연출로 작용합니다.”

    — 다카하시 데쓰시 지음, 황선홍 옮김, “가게 해부도감“(더숲), p5

    환경 조건이 인간의 행동을 “지배”한다는 결정론은 옳지 않지만 어느 정도의 “영향”은 줄 수 있다. 환경이 행동을 유도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을 이해하면 보다 바람직한 행동을 이끌어내는 디자인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읽는 중.

  • 추천 강연 동영상: 김성오, 배상민

    1) 베스트셀러 “육일약국 갑시다“의 저자 김성오님의 강연 (33분 50초 이후).

    https://www.youtube.com/watch?v=tYfRQjIQEo4

    책에 나온 내용을 거의 모두 소개하는 듯. 매우 훌륭한 멘탈을 가지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울 점이 무척 많다. (교회에서 이뤄진 강연이라서 동영상의 앞 30분은 찬양이 나옴.)

    2)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 배상민 교수의 강연

    최근 일터사명 컨퍼런스 2014에서 배상민 교수의 강연을 들었다. 일정 상으로는 한 시간 강연 예정이었는데 무려 두 시간 반을 이야기하고도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할 이야기가 많았다. 이야기가 너무 흥미진진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었지만 행사 진행자들은 무척 난감했으리라. 디자인을 바라보는 관점이 훌륭하다. 배상민 교수의 저서 “나는 3D다“도 추천. (위의 동영상은 2013년 10월 31일 과학기술 토크콘서트 녹화분) 이 두 사람으로부터 배운 점:

    1. 주어진 상황에 대해 불평하는 건 아무 소용이 없다.
    2. 잘 나가는 사람을 질시하기 보다 그들로부터 배울 점을 찾아라.
    3. 삶의 기준을 낮추면 당장은 편하지만 더 큰 물에서 경쟁할 수 있는 역량을 잃어버린다.
    4. 평소 혹독한 훈련에 스스로를 노출시켜야 실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
    5. 관찰하고 기록하고 의문을 품고 생각하고 행동에 옮겨라.
  • the deception within the family

    다음 한국어 사전 참조)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놀다가 다치기도 하고 자기들끼리 치고 받고 싸우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기도 하고 재산 상의 손해를 일으키기도 한다. 부모도 나름대로의 생활이 있기 때문에 아이들 생활 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항상 파악하기도, 일일히 통제하기도 어렵다. 때로는 아이들끼리 부모 몰래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고 지나가는 것이 차라리 나을 때도 있다. 물론 나쁜 습관으로 이어질 수 있는 일은 초기에 손을 써야하지만 때로는 일과성으로 지나갈 법한 아이들다운 짓거리에 지나치게 신경쓰거나 간섭하다보면 부모도 지치고 시행착오를 통해 아이들 스스로 인생을 배우는 기회를 잃게 되기도 한다.

    “남들이 하는 말에 마음을 쓰지 말아라. 자칫하다가는 네 종이 너를 욕하는 것까지 듣게 된다. 너 또한 남을 욕한 일이 많다는 것을 너 스스로 잘 알고 있다.” — 전도서 7:21-22(새번역)
    가까이 지내는 가족 내에서도 어느 정도의 비밀은 불가피하다. 다만 어떤 비밀은 좀 슬프다. 야곱에게는 12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10명이 작당해서 이복동생인 요셉을 아버지 몰래 노예로 팔아넘겼다. 그리고서는 그의 옷가지에 피를 묻혀와 혹시 짐승에게 물려 죽은 것 아닌지 모르겠다고 태연하게 아버지에게 보고했다. 우여곡절 끝에 32년이 지나서야 야곱은 죽은줄로만 알았던 아들 요셉을 다시 만나게 된다. 10명의 아들들이 자기들끼리만 몰래 간직해 왔던 비밀을 32년 동안 아버지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추측컨데 요셉은 아버지와 해후하고 난 뒤에도 형들에 의해 자신이 팔려오게 된 사연의 전말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 아버지에게는 계속 숨겼을 것 같다. 다만 아래 구절에 따르면 과거의 비밀이 밝혀진 것 같기도 한데 확실히는 잘 모르겠다.
    “요셉의 형제들은 아버지를 여의고 나서, 요셉이 자기들을 미워하여, 그들에게서 당한 온갖 억울함을 앙갚음하면 어찌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요셉에게 전갈을 보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남기신 유언이 있습니다. 아우님에게 전하라고 하시면서 ‘너의 형들이 너에게 몹쓸 일을 저질렀지만, 이제 이 아버지는 네가 형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여 주기를 바란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아우님은, 우리 아버지께서 섬기신 그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요셉은 이 말을 전해 듣고서 울었다.” — 창세기 50:15-17 (새번역)
    이 이야기도 형들이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지어낸 거짓말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자신이 심부름 보낸 자식이 사나운 짐승에게 물려 죽었다고 알고 평생을 자책하며 지내는 것과 이복형제들이 음모를 꾸며 아버지가 총애하는 동생을 죽이려고 하다가 생각이 바뀌어 노예로 팔아넘겼다는 사실을 알고 그런 놈들과 한집에서 여생을 보내야 하는 것. 어느 쪽이 더 괴로울까? 어쨌든 살아서 다시 아들을 만났으니 과거의 일은 어쨌거나 상관없는 일이 될 수도 있을런지도. 야곱 자신도 젊었을 때 자기가 쌍둥이형인 에서인척 하고 나이들어 앞을 잘 보지 못하는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형에게 돌아갈 예정이었던 축복을 가로챈 적이 있다. 다만 이 사기행각은 금방 들통이 나서 야곱은 형의 복수를 피해 멀리 친척집으로 도피해야만 했다. 묘하게도 자식에게 속아넘어갔던 아버지 이삭은 분노에 휩싸여 야곱에게 저주를 퍼붓기 보다는 이미 그렇게 되었느니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오히려 동생을 죽이고 싶을만큼 분노로 불타오른 건 형 에서였다. 그렇게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난 가족의 모습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어땠을까? (다른 이야기지만 에서와 야곱은 어디까지나 같은 날에 태어난 쌍둥이인데 꼭 형, 동생으로 지칭하면서 위계질서를 강조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쌍둥이로 태어나질 않아서 잘 모르는 것일 수도 있지만.) 사람들 사이에, 그것도 가족 안에서 추악한 모습이 존재함을 모르고 지나갈 수 있다면 차라리 속편한 일이겠지만 그걸 알고서도 용서하고 품어주기 위해서는 큰 사랑이 필요하다. 아버지의 역할이 바로 그런 것인지도.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하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서,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 누가복음 15:21-22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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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있어야 한다고 막연히 느낀다.
  • 판매자는 소비자의 위기의식, 불안감, 막연한 기대감에 호소한다.
  • 뭔가 아닌 것 같은 주장이 많지만 논리적으로 반박하기가 쉽지 않다. (위기의식, 불안감, 기대감을 충분히 자극했으므로 이미 논리의 영역을 벗어난 것이다.)
  • 가격이 상당히 부풀려져 있다고 느끼면서도 결국 값을 다 지불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미 논리와 합리성의 영역을 벗어났기에 가능하다.)
  • 대체로 써본 사람의 체험기가 함께 따라다닌다. 그러나 객관적인 신빙성에 의문이 많으며 인과관계가 분명하지 않다.
  • 한 사람이 하면 주변 사람이 따라하는 경향이 있다.
  • 비싸면 좋은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 이걸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 어떤 의미에서 막연한 안도감을 파는 것이지 구체적인 효능을 파는 것이 아니다.
  • 균형잡힌 식사를 하고 스스로 건강을 잘 관리하면 건강보조식품은 없어도 그만인 것처럼 학생 스스로 삶의 목표를 찾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체계적으로 공부한다면 사교육 없이도 잘 해낼 수 있다. 그리고 건강보조식품의 과장된, 또는 은근슬쩍 착각을 유도하는 주장을 반박할만한 판단 근거를 일반 소비자가 갖추기 어려운 것처럼, 사교육의 실질적 효용성이나 가치에 대해 객관적으로 판단할만한 비교 자료나 이론적 근거를 일반 소비자들이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소비자들은 매우 불리한 입장에서 거래를 하게 된다. “글루코사민이 관절염에 좋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글루코사민이 뭔지 알고 구매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참고: 약사 plutonian님의 글: “글루코사민 제제 효능에 대한 J약사의 생각(글루코사민은 무효다!))” 또한 건강보조식품을 섭취한 후 우리 몸 속에서 어떤 작용이 일어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단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 놓으면 그곳에서 어떤 수준과 품질의 경험을 하고 있는지 학부모들로서는 알기 어렵다. 학생 당사자들도 학원에서 제공하는 교육 품질에 대한 객관적 판단이 쉽지 않으리라. 결국 이런 식으로 공급자가 지배하는, 그리고 소비자가 휘둘리는 시장에서 사교육의 실질적 품질은 보장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틀을 깨기는 결코 쉽지 않다. 가공육이 대장암 발생과 연관성이 높다고 경고해도 소시지, 베이컨, 햄버거의 소비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해로울 수 있는 음식의 소비에 대해서도 이럴진대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는 건강보조식품이나 학습성과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는 사교육의 소비 패턴이 오죽할까. 내가 우려하는 것은 이런 현상이 오래 지속될수록 우리나라 소비자와 사회의 질적 수준이 꾸준히 낮아질 것이라는 점이다. (참고: 대학저널 2014년 1월 14일 기사 “사교육은 어쩌다 거대한 공룡이 됐나?” 결국 건강한 식생활을 하는 것은 개인의 결정으로 귀착되는 것처럼 상품화된 사교육의 흐름에서 벗어나 자기 스스로의 가치와 판단에 맞는 교육 방법을 찾는 것은 개인의 몫이라고 해 둘 수 밖에 없는 것인가? 아니면 상품이라는 속성에 맞게 교육인적자원부가 아닌 한국소비자원(한국소비자보호원에서 2007년에 개명)과 공정거래위원회에서 사교육시장을 다스리면 해법이 보이지 않을까? 약간 관점은 다르지만 의료라는 맥락에서 사교육을 생각해 본 김범석님의 글 “사교육이 암환자에게 미치는 영향“도 참고가 된다.]]>

  • lean scheduling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못할 것이요 구름만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못하리라” (Whoever watches the wind will not plant; whoever looks at the clouds will not reap.) — 전도서 11:4 (개정개역/NIV) 위의 구절에서 풍세와 구름은 외부 환경을 가리킨다. 세상이 흘러가는 흐름 또는 트렌드에 대한 어느 정도의 예측은 의사결정에 있어 참고가 된다. 그러나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불확실성 그 자체에 집착하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우유부단함의 함정(indecision loop)에 빠져 정말 아무 것도 못하게 된다. 예컨대 10월 둘 째 주에 체육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면 그날 비가 오든 안 오든 일단 체육대회를 여는 것으로 전제하고 계획을 추진해야 한다. 대회 개최를 전제로 하고 그날 비가 올 경우의 대비를 세워야 하는 것이지, 혹시 비가 올지 모른다는 걱정에 계획 추진 자체를 망설이고 있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와 연관된 몇 가지 생각들:

    1. 거의 확정적인 것을 불확실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곤란하다: KTX 출발 시간이 12:05로 되어 있으면 그런 줄 알고 시간 맞춰서 역에 나가는 것이 맞다. 열차는 대체로 시간을 잘 지키는 편이다.
    2. 불확실성이 내재된 약속은 확인 단계를 추가하라: 분명히 회의에 참석하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나타나지 않는 사람이 간혹 생긴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깜박 잊어버렸거나 시간과 장소를 착각해서 그런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참석하겠다는 약속은 “의도”다. 이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회의 전날에 확인 전화나 문자 메시지를 보내라.
    3. 근본적으로 불확실한 것에서 확실한 경향을 찾아내려는 시도는 무모하다: 효율적 시장 가설에 의하면 주식 시장의 단기적 흐름은 본질적으로 예측할 수 없다. 특정 주식이 오를 것 같다는 직감을 스스로 믿어버리는 것은 망상이다.
    4. 확정적인 것과 불확실성을 구분하라: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그리고 죽을 때는 아무 것도 저 세상에 가지고 갈 수 없다. 이건 확정적인 사실이다. 다만 언제 어떻게 죽을지, 누가 먼저 죽을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5. 해야하는 일이 있다면 먼저 스케줄을 정하고 나서 외부 변수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라: 제품 개발과 마찬가지로 시간의 설계에 있어서도 일단 프로토타입으로서의 계획을 세워보고 나중에 수정하는 편이 일의 진척이 빨라진다.
    정말이지 풍세만 살펴보고 있으면 아무 일도 못한다. 주어지는 미래만 바라보지 말고 스스로 미래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바꾸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

  • 글쓰기에 대해서

    “Friendship is unnecessary, like philosophy, like art…. It has no survival value; rather it is one of those things which give value to survival.” — C. S. Lewis, The Four Loves 짧게라도 자주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고치고 다듬는 작업이 그나마 글쓰기 연습이 되어 다행이다. 하지만 A4 용지 한 장 분량에도 미치지 못하는 짧은 글 위주로 계속 적다보니 체계적으로 긴 이야기를 풀어내는 논문 형식의 글쓰기와는 점점 멀어져가는 느낌이다. 보다 긴 호흡의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글은 블로그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데.]]>

  • 대화력

    “누가 뭐래도 영업맨의 가장 큰 무기는 ‘대화력’이다. 고객과 대화하면서 고객이 원하는 것을 파악하고 그것에 맞는 정보를 제공하며 계약을 이끌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영업맨은 이 일련의 작업을 오로지 대화력으로 끌고 나가야 한다.” — 도키 다이스케 지음, 김윤수 옮김, “왜 나는 영업부터 배웠는가” (다산3.0), p109 이 글을 읽고 든 생각 몇 가지:

    1.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잘 할 수는 없고 저마다의 재능이 다른데 ‘대화력’은 나의 강점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나는 영업을 할 수 없다고 봐야 하나? 과연 대화력은 노력하면 키울 수 있는 것일까? (원래 말수가 없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성격을 타고난 저자는 그것이 가능하며 자신이 그 사례임을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다.)
    2. 나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는 ‘경청력’은 좀 있는 것 같은데 그걸로는 부족한가보다.
    3. 어쨌거나 누군가와 단둘이 조용히 만나는 일 자체가 많지 않다. 내가 누군가를 식사에 초대하는 일도 드물고 누군가가 나를 특별히 불러내는 일도 드물다. ‘대화력’이라는 걸 연마하려면 사람을 만나는 기회부터 만들어놓고 봐야 할텐데 어쩌나.
    4. 함께 나누는 대화가 즐겁다고 느끼는 사람과는 ‘관계를 지속하고 싶다’, ‘또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드는 걸로 보아 진정한 대화력을 가진 사람이야말로 훌륭한 영업맨이 될 가능성이 높간 하겠다.
    5. 내가 만나본 ‘영업맨’ 중에서는 일방적으로 자기 이야기를 밀어붙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대화’를 잘 한다고 느끼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꼭 뭔가를 판매하는 영업맨이 아니고 남을 돕는 입장에 있는 사람, 예컨대 의사 같은 사람에게도 대화력은 중요하다. Atul Gawande의 최근 저서 Being Mortal에서 말기암환자를 대하는 의사의 대화 방식에 대한 이야기가 무척 인상 깊었다. 암 치료를 위한 여러 가지 화학요법을 일방적으로 전달하고 환자에게 결정을 촉구하는 정보전달형 의사(informational doctor)가 있는가 하면 상대적으로 드물게 환자의 삶의 우선순위를 먼저 묻고 환자가 진정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바에 보다 적합한 치료 방법을 권하는 해석지향형 의사(interpretive doctor)가 있는데 후자가 훨씬 더 바람직하다는 이야기였다. 특히 저자의 아버지가 척수암을 앓는 과정에서 실제로 겪은 사례를 들어 설명했는데 대화를 통해 환자가 원하는 삶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이를 존중하여 환자와 의사 사이의 상호협력적 결정을 이끌어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줬다. 영업맨이 되었건 전문인이 되었건 대화력은 간과할 성격의 일이 아니다. 그 누구든 자신의 책무에 더 어울리는 대화력을 계발하기 위해 관심과 노력을 쏟아야 한다. – – – 참고:
    1. Ezekiel and Linda Emanuel 부부의 1992년도 논문: “Four Models of the Physician-Patient Relationship“, JAMA. 1992;267(16):2221-2226)
    2. 김민정, “의사의 커뮤니케이션 스타일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연구“, 한국언론학회, 제53권 3호, 2009.6, 146-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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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ulogy

    eulogy. The term comes from Latin eulogium, from Greek eulogia, meaning “praise; good or fine language”, according to Online Etymology Dictionary. In the era of social media, which allows many people to pitch in to leave short messages on a topic, perhaps it is possible for the mourners of a deceased to leave collaborative eulogy on the web, for instance, on an online message board or a comment system. This would enable remembering the life of the deceased from various viewpoints. Such collaborative, or open, eulogy, on the other hand, might render unexpected or even undesirable effect, such as less-than-kind remarks being left on the message board. An example might go like this, “The late Mr. John Doe was not really that saintly person as many of you think he was. When he was the purchasing manager at the company, he often received bribes from the suppliers under the table.” While this kind of unfriendly revelation would add thrill to the funeral by exposing the reality of being an erring human being, not everyone wants to know every aspect of the life of the deceased. Also, it is somewhat unfair because we cannot give the very person in question a chance to refute the derogatory claim. Therefore the eulogy, not the factual revisitation. Gone is gone and, as the song “The Way We Were” goes, “We simply choose to forget. So it’s the laughter we will remember whenever we remember the way we were.”]]>

  • iteration

    Power of Repeat“이라는 제목으로 반복이 주는 유익에 대해 썼는데 IDEO사의 “Made in the Future” 프로젝트 중 Outer Skills 라는 제목의 동영상을 보면서 ‘목적성이 있는 반복’을 이야기하려면 repeat 보다는 iteration이 더 적당한 용어임을 알게 되었다.

    it·er·a·tion noun \ˌi-tə-ˈrā-shən\ a procedure in which repetition of a sequence of operations yields results successively closer to a desired result — Merriam-Webster Online
    Repeat이나 iteration이나 영한 사전에서는 “반복”으로 풀이되지만 이 두 단어는 각각 단순한 반복과 어떤 목적에 가까이 가기 위한 반복이라는 개념적 차이가 있다. Iteration에 해당하는 적절한 우리말 표현이 분명 존재할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일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매일 해가 뜨고 해가 지고,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고 밤에 잠이 드는 순환이 반복되지만 우리의 하루하루의 삶은 과연 repeat인가 iteration인가?]]>

  • chronology

    존 러스킨 지음, 곽계일 옮김,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아인북스) 부록에 나오는 존 러스킨의 연표를 보면 그의 생애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청년시절 좋아했던 여성(Adele Clothilde Domecq)과는 어머니의 반대로 결혼하지 못했으며, 결국 아내가 된 사람(Effie Gray)과는 결혼 6년만에 파경을 맞고, 이혼 후에 자기보다 한참이나 나이 어린 여성(Rose La Touché)에게 구혼했다가 거절당한다. 그리고 존 러스킨은 노년에 정신착란을 겪는다. 이걸 보고 생각해 보았다. 만약 개인의 이력서에 좋은 일과 안 좋은 일을 모두 적는다면 얼마나 이야기가 파란만장할까? 여러 가진 면에서 뛰어난 인물도 항상 좋은 일만 겪었으리라는 보장이 없으니 말이다.

    “야곱이 바로에게 대답하였다.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가 백 년 하고도 삼십 년입니다.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 창세기 47:9 (새번역)
    – – – – – 참고 1: 구직 이력서에 안 좋은 경험을 적는 가상의 예:
    • “어린시절부터 저의 집에서는 가정불화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지간한 갈등상황에서도 동요하지 않는 배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 “제가 살아온 28년 중 4년 가량을 병원에 입원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환자의 고충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 “저는 총 여섯 차례의 교통사고를 당한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경험을 통해 저는 안전에 대한 인식과 위기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남다릅니다.”
    참고 2: 최인 님의 글 “존 러스킨(John Ruskin)의 생애와 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