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의사가 쓴 글과 디자이너가 쓴 글을 좋아한다. (디자이너에는 건축가도 포함된다.) 의사가 쓴 글에는 자신의 책임과 사명에 대한 진지함과 함께 복잡한 현상 속에서 인과관계를 찾아내는 과학적이고도 합리적인 관점이 묻어나서 좋다. 한편 디자이너의 글–물론 글을 잘 쓰는 디자이너에 국한되지만–에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삶의 현장을 새로운 시각으로 꿰뚫어보는 깊은 통찰이 드러나서 좋다.
구마 겐고라는 일본의 건축가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지만 같은 출판사에서 같은 판형과 형태로 출간한 ‘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라는 책을 워낙 재미있게 읽은 터라 같은 기대를 가지고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저자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듯 적어내려간 글이 시원시원하게 읽힌다. 그리고 저자가 세계를 돌아다니며 작업하면서 건축가로서 바라보는 시대의 흐름과 세계가 직면한 현실에 대한 예리한 통찰이 무척 유익하다.
“우리는 클라이언트를 위해서도 물론이지만, 후세에 남을 건축을 만들기 위해 자신들의 한정된 시간을 바치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엄격한 시간 운영과 큰 책임이 생깁니다.”
— 구마 겐고 지음, 민경욱 옮김, 나, 건축가 구마 겐고, 안그라픽스, p298
위의 인용구는 번역이 약간 어색하긴 하지만 건축가의 사명이 단지 클라이언트를 만족시키고 설계수수료를 챙기는 차원이 아니라 세상에 뚜렷한 흔적을 남기게 되는 작업이기 때문에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태도, 작업을 대하는 자세가 느슨하거나 막연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어 나에게도 귀감이 된다.
책 속에는 저자가 시대의 트렌드를 보는 긴 안목도 소개되고 있을 뿐 아니라 세계를 누비며 하루 하루를 바쁘게 살아가는 전문가로서 나름대로 터득한 생활의 요령과 같은 세부적인 항목도 심심찮게 등장해서 묘미를 더한다.
“이만한 여행이라도* 짐은 기내에 가지고 들어가는 가방은 하나입니다. 만일 수트케이스를 가져갔다가 공항에서 나오지 않는 경우가 생기면 그 이후의 여정이 엉망이 되니 절대 가지고 가지 않습니다. 최소한의 짐으로 어떻게 여행할지에 대해서는 복장을 포함해서 이미 연구를 마친 상태입니다.”
— 같은 책, p26 (*약 2 주간에 걸쳐 베이징, 홍콩, 미얀마, 파리, 에든버러, 뉴욕까지 지구를 한 바퀴 도는 출장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에서)
“읽고 있어서 즐겁다”라는 느낌이 드는 책이었다. 그리고 본문 이후에 이어지는 ‘나가는 글'(편집자 기요노 유미), ‘감수의 글’ (임태희), ‘옮긴이의 글’ (민경욱)을 보면서 마지막까지 정성을 들여 만든 책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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