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thoughts

  • simultaneous interpretation service at church meetings

    특별한 기회가 주어져 이틀 연속으로 각각 다른 우리말 설교를 영어로 동시통역을 맡았다.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이 교회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을 때 짧게는 25분, 길게는 60분에 가까운 설교 시간동안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하는데 이들을 위해 불충분한 통역이라 할지라도 아주 없는 것보다는 나은 수준에서의 통역을 제공하는 것이다. 방문객이 소수이므로 방송실에서 동시통역을 하면 무선수신기를 통해 이어폰으로 전달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설교를 영어로 옮길 경우 특히나 난감하게 느끼는 요소는 다음과 같다.

    1. 전문적인 신학용어: 해당되는 영어단어 자체를 모르는 경우. 예컨대 ‘설교학’을 영어로 ‘homiletics’라고 한다는 걸 겨우 알았다고 하더라도 ‘구약학’은 도대체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2. 성경에 나오는 지명이나 인물: 영어식 발음을 모르는 경우. 예컨데 다리오(Darius)왕의 영어식 발음은 ‘드라이어스’고 아이(Ai)성은 ‘에이아이’다. 후자의 경우 영어 사전에도 잘 나오지 않는다. ‘아하수에로’왕이나 ‘아닥사스다’왕은 영어로 과연 어떻게 발음할까? 이런 단어들은 준비없이 맞닥뜨리게 되면 아주 곤란하다. 이런 특별한 단어의 영어 발음을 확인하려면 스마트폰의 성경 앱에서 영어 본문을 찾은 뒤 읽어주기 기능을 활용하면 좋다.
    3. 한국 특유의 문화나 시사적인 내용이 소재로 등장할 때: 직역하면 의미전달이 안 되므로 별도의 해설을 곁들여야 하는 경우. 예컨대 신경숙 작가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가 예화로 언급될 경우 최근 영문 번역판이 ‘Please Look After Mom‘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음을 모르면 난감할 수 있다.

    이렇게 난감한 상황에는 어설프게 통역하려다 듣는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지 말고 잘 모를 때는 그냥 조용히 넘어가는 편이 낫다.

    이번 경우에는 급하게 섭외가 되어 거의 설교 시작 직전에 원고를 건네 받은 관계로 사전 번역을 해놓을 여유조차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내가 과연 통역을 잘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우려로 노심초사했을 텐데 최근 무언가 깨달은 바가 있어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한다는 생각으로 부담없이 했다. 통역에 참여함을 통해 설교 내용을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좀 더 오래 기억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직접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손님을 대접할 때 음료나 간식거리를 내놓을 경우 서빙하는 사람이 음료나 간식거리를 미리 맛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평소 생각하는 바인데, 그 이유는 손님에게 무얼 내놓는지 알고 대접하는 것이 의도하지 않은 실수를 예방하고 또한 자신의 서비스에 대해 자신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통역과 같은 무형의 서비스도 그 품질을 미리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자원봉사 성격을 가진 통역 서비스의 품질관리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어려움이 있다:

    1. 서비스 제공자(통역자)와 서비스를 받는 사람(외국인 손님) 사이에서 통역 품질을 검증할 수 있는 장치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 사후 서비스 평가가 객관적으로 이뤄지기 어렵다–외국인들에게 설교 통역이 어땠냐라고 물었을 때 과연 솔직한 대답을 기대할 수 있을까?
    3. 자원봉사의 형식으로 통역 서비스가 제공되므로 교회 측에서 통역자에게 서비스 품질에 대한 개선을 당당하게 요구하기가 껄끄럽다
    4. 서비스 수준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대체 인력을 손쉽게 구할 수가 없다.
    5. 자신의 오타를 발견해내기 어렵듯이 통역자 본인이 자신의 통역 품질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이런 난점을 보완하기 위한 방법으로, 주어진 맥락에서는 어떤 수준의 품질이 요구되는지, 성공적인 사례는 어떠했는지, 그리고 지속적인 서비스 향상을 위해 본인이 어떻게 하면 좋은지에 대한 제안 등을 교회 측에서 문서형태로 준비해서 자원봉사자에게 제공한다면 자발적 서비스라는 특징에 어울리는 품질 향상을 기대할 수 있겠다. 또한 서비스 모니터링 역할을 할 자원봉사자를 함께 임명해서–서로 누군지 모르게–지속적인 피드백을 줄 수 있다면 더욱 바람직하리라 생각한다.

    아울러 교회에서의 통역 서비스에 대한 대안을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았다:

    1. 설교 내용을 미리 번역하여 문서 형태로 제공해서 각자 읽게 하거나 화면에 자막으로 제공한다
    2. 번역문을 준비하기 어렵다면 설교 내용과 어느 정도 연관된 읽을거리를 제공하여 설교가 진행되는 동안 읽을 수 있게 한다
    3. 외국에서 오신 손님들을 집회 중간에 모시고 나와서 남은 시간동안 별도의 장소에서 소수의 인원이 참석하는, 나눔 중심의 영어 모임을 준비한다.
  • Lesson on Eating

    “교육받은 페르시아인은 어떤 종류의 음식이나 음료의 노예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음식을 바라보며 흡족해하거나 그것을 집으려고 탐욕을 부리지도 않았다. […] 훈련받은 기수는 달리는 말에서도 자기 통제력을 잃지 않고 보고 듣고 말할 수 있어야 하듯이, 교육받은 페르시아인은 식사할 때 양식있고 절제된 행동을 보여야 한다. 음식이나 음료를 보고 흥분하는 것은 돼지 같고 상스럽게 여긴다.”

    — 크세노폰 지음, 이은종 옮김, 키로파에디아, 주영사 p244

    “But his mood changed as he watched the grace and decorum of the company; and saw that not a single Persian who had been schooled would ever gape, or snatch at the viands, or let himself be so absorbed in eating that he could attend to nothing else; these men prided themselves on showing their good sense and their intelligence while they took their food, just as a perfect rider sits his horse with absolute composure, and can look and listen and talk to some purpose while he puts him through his paces. To be excited or flustered by meat and drink was in their eyes something altogether swinish and bestial.”

    — Xenophon, Cyropaedia

    *원문과 비교해보면 우리말 번역이 얼마나 깔끔하고 명료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이 내용을 읽고 나서 음식 사진 찍는 습관을 버려야 하지 않을까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 dress code: black tie

    중요한 행사에 초대를 받았는데 드레스코드가 “블랙 타이(black tie)”란다. 블랙 타이라면 검은 넥타이를 하고 오라는 이야기인가? 장례식 복장과 비슷하게? 의아하던 차에 혹시나해서 black tie를 검색해보니 턱시도에 나비넥타이를 맨 복장이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 행사 하루 전에 이런 걸 알려주다니. 턱시도는 도대체 어디에서 대여하는 건지도 몰라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겨우 구해서 입고 갈 수 있었다. 막상 행사장에 가보니 주최측이 의도했던 턱시도+나비넥타이 복장을 하고 온 남자는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몇 가지 배운/느낀 점:

    • 어떤 자료에 의하면 서양에서 행사의 드레스코드를 굳이 블랙타이로 명시할 때는 그만큼 공들여 준비한 행사이니만큼 참석자들도 어느 정도의 격식을 차려 와주십사하는 의미라는 이야기라고. 그런 자리에 적절한 예복을 갖춰 입고 가지 못할 경우에는 차라리 초대를 정중히 사양하는 것이 예의라고 한다.
    • 복장 안내서에는 나비넥타이(bow tie)는 직접 매는 걸 착용할 것을 권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걸 구하기가 어렵고 이미 매듭이 만들어져 있고 고리로 걸기만 하면 되는 간이식 나비넥타이가 대부분이다. 얼핏 보기에 별 차이도 나지 않으므로 일단 간이식 나비넥타이도 괜찮을 듯.
    • 턱시도 복장의 원형을 따르자면 복대를 하는 것이 원칙이나 요즘은 안 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
    • 턱시도를 입고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듯. 행사장까지 가져가서 화장실 등에서 갈아입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 처음엔 연미복과 턱시도가 같은 건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턱시도는 앞단추 부분을 제외하면 일반 양복과 큰 차이가 없어보인다.
    • 턱시도는 미국에서도 일년에 한번 입을까 말까 한 옷이라고. 우리나라에서는 오죽할까.
    • 여성의 경우 이브닝가운을 입고 가야한다는데 얼마나 신경이 많이 쓰일까를 생각하면 안쓰럽다.
    • White tie 이벤트에 초대받을 일은 거의 없을 듯.
  • 키로파에디아(Cyropaedia) – 키루스의 교육

    ‘경영햑을 만든 사람’이라고 일컬어지는 피터 드러커는 경영에 대해 배우는 방편으로 고전 읽기를 추천하곤 했다. 말하자면 어지간한 경영학 수업을 듣는 것보다 셰익스피어의 연극 한편을 보러가는 편이 경영에 대해 배울 내용이 훨씬 많다는 이야기다.

    피터 드러커가 추천한 책 중에 기원전 400년 전후에 살았던 크세노폰(Xenophon)이라는 인물이 쓴 (1) 아나바시스와 (2)키로파에디아라는 책이 있다. 크세노폰이 참여한 전쟁에 관한 기록인 아나바시스는 약 10년 전에 무척 재미있게 읽었고, 드러커가 “리더십을 체계적으로 다룬 최초의 책이자 최고의 책“이라고 극찬한 키로파에디아: 키로스의 교육“(이은종 옮김, 주영사 간)을 최근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페르시아 왕국을 세운 키루스 2세(Cyrus the Great) 왕이 어떤 교육을 받아 성장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왕으로서의 면모를 보였는지를 기록한 것이다. 제목부터가 생소한데 기원전 4세기 무렵에 쓰였으니 오죽 고리타분할까 싶은 선입견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는데 기우에 지나지 않았고 몇 페이지 지나지 않아 몰입되고 말았다. 21세기에 이른 오늘날에도 시사점이 무척 많다. 과연 드러커가 추천할만한 책이라는 느낌이 온다.

    참고로 이 책의 주인공인 키루스 2세는 성경에 나오는 고레스왕과 동일 인물이다. 매우 추천.

  • Understanding Dimensions

    수원 광교지구에 새로 조성된 멋진 호수공원 안에 있는 안내판을 보며 드는 생각:

    • “m”이 “미터”에 해당한다는 건 몇 살부터 알 수 있을까?
    • “200미터”는 어느 정도의 거리인가? 가까운가? 먼가?
    • “화장실”이라는 문자를 픽토그램으로 바꿀 수 있다면 화장실까지의 거리를 나타내는 다른 방법은 무엇일까?
    • 공원과 같은 공공시설에는 면적 또는 직선거리당 몇 개의 화장실을 설치해야 한다는 권고 기준이 과연 존재할까?

    참고로 200m는 생각보다 멀다.

  • Cynthia Montgomery, The Strategist

    하버드비즈니스스쿨(HBS)의 신시아 몽고메리(Cynthia Montgomery)교수가 쓴 “당신은 전략가입니까?(원제: The Strategist, 이현주 옮김, 리더스북)”라는 책을 추천받아 읽고 있다. 몽고메리 교수가 진행하는 최고경영자과정 수업의 내용을 구성한 책인데 HBS의 수업 분위기도 들여다 볼 수 있고 “학교”에서는 비즈니스 전략에 대해 어떤 식으로 접근하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한편, 국내 비즈니스에 관해서라면 윤태호 지음, “미생-아직 살아있지 못한 자“라는 만화책이 추천할만하다.]]>

  • 빅터 프랭클 인용구 색인

    죽음의 수용소에서“(청아출판사 간, 원제 Man’s Search for Meaning)를 읽고 감명 깊었던 인용구를 모아 색인을 만들었다. (괄호 안은 페이지 수)

    • “성공을 목표로 삼지 말라. 성공을 목표로 삼고, 그것을 표적으로 하면 할수록 그것으로부터 더욱 더 멀어질 뿐이다. 성공은 행복과 마찬가지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이다.” (10)
    •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Those who have a ‘why’ to live, can bear with almost any ‘how’.) (19)
    • 밖에 있을 때 지적인 활동을 했던 감수성 예민한 사람들은 육체적으로는 더 많은 고통(그런 사람들은 흔히 예민한 체질을 가지고 있으니까)을 겪었지만 정신적인 측면에서 내면의 자아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비교적 적게 손상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혹한 현실로부터 빠져 나와 내적인 풍요로움과 영적인 자유가 넘치는 세계로 도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75-76)
    • 미래의 목표를 찾을 수 없어서 스스로 퇴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하는 일에 몰두한다. (129)
    • 수용소에서 수감자가 입은 정신병리적 상처를 정신요법이나 정신위생학적 방법을 이용해 치료하려면 그가 기대할 수 있는 미래의 목표를 정해줌으로써 내면의 힘을 강화시켜주어야 한다. (131)
    • 미래–그 자신의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수감자는 불안한 사람이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과 더불어 그는 정신력도 상실하게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을 퇴화시키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퇴락의 길을 걷는다. 일반적으로 이런 현상은 아주 갑자기, 위기라는 형태를 띠고 일어난다. (133)
    • 그것은 대부분의 수감자들이 성탄절에는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희망적인 뉴스가 들리지 않자 용기를 잃었으며, 절망감이 그들을 덮쳤다. 이것이 그들의 저항력에 위험한 영향을 끼쳤고,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기에 이른 것이다. (136)
    •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We needed to stop asking about the meaning of life, and instead to think of ourselves as those who were being questioned by life—daily and hourly.)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했다. (138)
    • 사람은 어느 정도 긴장 상태에 있을 때 정신적으로 건강하다. 그 긴장이란 이미 성취해 놓은 것과 앞으로 성취해야 할 것 사이의 긴장, 현재의 나와 앞으로 되어야 할 나 사이에 놓여 있는 간극 사이의 긴장이다. (175)
    • 두 번째 인생을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당신이 지금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So live as if you were living already for the second time and as if you had acted the first time as wrongly as you are about to act now.) (182, 237)
    • 소위 자아실현이라는 목표는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자아실현을 갈구하면 할수록 더욱 더 그 목표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아실현은 자아초월의 부수적인 결과로서만 얻어진다는 말이다. (184)
    • 우리는 삶의 의미를 세 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그리고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 (184)
    • 사랑은 다른 사람의 인간성 가장 깊은 곳까지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의 본질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 (Love is the only way to grasp another human being in the innermost core of his personality. No one can become fully aware of the very essence of another human being unless he loves him.) (184)
    • 만약 그 시련이 피할 수 있는 것이라면 시련의 원인, 그것이 심리적인 것이든, 신체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인간이 취해야 할 의미 있는 행동이다. 불필요하게 고통을 감수하는 것은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자기학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188)
    • 하지만 행복은 얻으려고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Happiness cannot be pursued; it must ensue.) 사람이 행복하려면 ‘행복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일단 그 이유를 찾으면 인간은 저절로 행복해진다. (221)
    • 각각의 장면에 다 뜻이 있고 의미가 있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의미는 마지막 장면이 나오기 전까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부분, 개별적인 장면들을 보지 않고서는 영화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 삶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삶의 최종적인 의미 역시 임종의 순간에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228)
    • 인간이 시련을 가져다 주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그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는 있다. (233)
    • 이런 견지에서 본다면 나이든 사람을 불쌍하게 여길 이유가 전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젊은 사람들은 나이든 사람들을 부러워해야 한다. 물론 나이든 사람에게 미래도 없고, 기회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다. 미래에 대한 가능성 대신 과거 속에 실체, 즉 그들이 실현시켰던 잠재적 가능성들, 그들이 성취했던 의미들, 그들이 깨달았던 가치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 어느 누구도 과거가 지니고 있는 이 자산들을 가져갈 수 없다. (From this one may see that there is no reason to pity old people. Instead, young people should envy them. It is true that the old have no opportunities, no possibilities in the future. But they have more than that. Instead of possibilities in the future, they have realities in the past–the potentialities they have actualized, the meanings they have fulfilled, the values they have realized–and nothing and nobody can ever remove these assets from the past.) (238)
    • 어떤 상황에서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이 잠재적으로 의미 있는 것으로 남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각 개인의 가치는 언제나 그 사람과 함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사람이 과거에 실현시킨 가치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그 사람이 쓸모 있느냐 없느냐 하는 조건에 기반을 둔 것은 절대 아니다. (238)
    —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 지음, 이시형 옮김, “죽음의 수용소에서“(청아출판사 간)
    번역도 잘 되었다. 이 책의 추천 강도는 90%.]]>

  • G.K. Chesterton, Orthodoxy

    나누고 쪼개도 알 수 없는 세상“에서 G.K. 체스터턴의 오소독시(Orthodoxy)가 인용된 것이 눈에 띄어 읽어보기로 했다. 36 페이지에 가토 다이조, 티모시 켈러, 빅터 프랭클이 한 이야기와 맞닿아있는 글이 있었다.

    당신의 자아가 당신의 인생 속에서 좀더 작아질 수만 있다면 당신의 인생은 얼마나 더 폭넓어질 수 있을까요! 만일 당신이 정말로 다른 사람들을 평범한 호기심과 즐거움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다면, 그리고 그들이 주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그저 쾌활하게 걸어가고 있을 뿐임을 당신이 알기만 한다면! 당신은 그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들은 당신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 G.K. 체스터튼 지음, 윤미연 옮김, 오소독시, 이끌리오 간
    How much larger your life would be if your self could become smaller in it; if you could really look at other men with common curiosity and pleasure; if you could see them walking as they are in their sunny selfishness and their virile indifference! You would begin to be interested in them, because they were not interested in you. — G.K. Chesterton, Orthodoxy
    *내가 가진 책은 2003년도에 나온 번역판인데 2010년도에 상상북스에서 홍병룡 옮김, “정통”이라는 제목으로 새로 출간되었다. Orthodoxy의 원어 원문은 Project Gutenberg에 공개되어 있다.]]>

  • 후쿠오카 신이치 3종 세트

    일본 아오야마가쿠인대학의 생명과학과 교수 후쿠오카 신이치는 올해 54세의 분자생물학자다. 문학적 재능이 다분한 그는 과학저널리스트로서 책도 쓰고 번역도 하는데 읽어보니 글솜씨가 남다르다.

    그의 책 “생물과 무생물 사이”에 대해 요시모토 바나나라는 일본 소설가는 “스릴과 절망 그리고 희망과 반역이 빚어내는 흥미진진한 책”이라 평하고 있다. 과학서적에 대해 이런 평을 쓴 것이 의아했는데 책을 읽어보니 과연 그렇다. 그의 책을 읽다보면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스치고 지나갈 때도 있다. 예컨대 다음 문장에서 처럼.

    6월. 차창 밖 밭에서는 콩처럼 생긴 이름 모를 작물이 눈부실 정도로 푸르게 자라고 있었다. 초여름 바람이 그 동그란 잎을 모조리 뒤집으며 쓸고 지나갔고, 뒤집힌 이파리의 물결은 저기 저 멀리로 달음질쳤다.

    — 후쿠오카 신이치 지음, 김소연 옮김, 나누고 쪼개도 알 수 없는 세상, 은행나무 간, p7

    그의 책은 자신의 전공분야인 분자생물학을 주요 소재로 삼고 있어서 일반인에게는 생소한 어휘가 자주 등장한다.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읽고 나면 왠지 재미있었다는 인상이 남는다. 마치 마카롱에 아몬드 분말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마카롱을 먹고는 맛있다라고 느낄 수 있음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의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음에는 공들여 번역한 번역자(김소연)의 역할이 크다고 본다. (참고: 번역의 품질에 따라 사람들의 호불호가 얼마나 갈리는지에 대한 단편을 볼 수 있는 포스팅) 번역자인 김소연은 후쿠오카 신이치의 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 다음엔 작가의 문장력에 끌렸다. 분명 과학 서적 같은데 호흡이 길면서도 이 포근하고 사려 깊은 문장은 문학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기품이 있다. 깊이 있고 상세한 묘사와 사물을 보는 통찰력은 어쩌면 과학자이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 후쿠오카 신이치,김소연 옮김, 생물과 무생물 사이, 은행나무 간, p248 역자 후기에서

    제목에는 3종 세트라고 썼지만 국내에 번역된 후쿠오카 신이치의 책이 두 권 더 남아있다. 일단 쉬었다가 다음에 읽어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