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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tes on food photography

    레스토랑을 운영하시는 분이 메뉴판에 사용할 사진을 찍어달라는 부탁을 하셨다. 사진이 취미라서 여러 행사에서 사진 촬영을 부탁받아봤고, 밥먹기 전에 습관적으로 음식 사진을 찍어놓기는하지만 이렇게 구체적이고도 직접적으로 상업적 용도의 사진을 찍어야 하는 상황은 처음이라서 생각이 많아진다. 그 중 일부를 기록해 둔다.

    대상 vs 맥락

    “음식”과 “음식을 먹는 행위”는 다르다. 음식을 고정되고 독립된 대상물(still object)로 찍은 사진과 누군가가 식사를 즐기는 맥락의 한 장면으로서 식탁 위의 음식을 찍는 장면(scene)은 비슷한 듯 해도 엄연히 다른 사진이다. 후자의 경우도 개인이 식사를 하는 맥락과 여러 사람이 음식과 식탁을 매개로 교제를 하는 맥락은 다르다.

    메뉴판에 올라가는 사진은 맥락을 제거한 독립적이고 객관화된 견본(specimen)으로서의 기능이 우선적으로 요구된다. “이 메뉴를 시키면 대략 이런 모습의 음식이 나옵니다”라는 메시지 전달이 메뉴판 사진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과장되지 않게, 그러면서도 음식이 가진 장점을 최대한 드러내는 사진을 찍는 것이 메뉴판 사진의 요구 조건이다. 말하자면 음식의 증명사진 혹은 프로필 사진에 해당한다.

    다른 한편, 맥락을 함께 나타낸 사진을 통해 “우리 레스토랑에서 이 음식을 주문하면 식탁에 앉은 분들이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메뉴판이 아니라 레스토랑 광고에 더 잘 어울린다. 이런 사진은 말하자면 가족 사진에 가깝다.

    스타일링의 중요성

    스마트폰이 보편화되어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 있고, 조명 조건과 각도를 잘 맞추면 아주 근사한 사진이 나오기 때문에 사진 이미지를 남기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면 굳이 외부 사진사를 불러올 필요가 없다. 음식 사진 촬영은 좋은 카메라를 세팅해 놓고 셔터를 누르는 작업보다 음식을 어떤 모습과 상태로 준비해야 할지를 레스토랑과 함께 조정(coordinate)하는 스타일링과정에 그 핵심이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 카메라의 ISO 감도, 셔터 스피드, 조리개 개방 등의 조건에 앞서 테이블 세팅과 플레이팅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메뉴 본연의 모습을 누구의 기준으로 조정할 것이냐가 문제가 될 수 있다. 레스토랑 운영 주체가 보기에 “이만하면 됐다”라고 내놓는 요리가 사진사의 취향에는 만족스럽지 못할 경우 과연 어느 선까지 개선을 요구할 수 있을까? 잘못하면 레스토랑 주인과 주방장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 될 수 있으니 무척 조심스럽다.

    한편, 사진에만 근사하게 나오고 실제 서빙되는 음식은 메뉴판 사진에 미치지 못한다면 과연 그 메뉴판은 잘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예컨대 다음 사례를 참고하라:

    메뉴판 사진
    실제 상품

    메뉴판의 본질

    레스토랑에서의 근사한 식사의 핵심은 스토리텔링이고 메뉴판은 그 스토리의 여정을 보여주는 지도다. 레스토랑에 들어와 테이블로 안내되어 자리에 앉아 메뉴를 고르는 과정은 그 여정을 시작하기 위한 리추얼에 해당한다.

    레스토랑에 찾아오는 고객은 대체로 한끼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하는 사람과 뜻깊은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 오는 것이다. 즉, 고객에게는 음식 그 자체보다 자신의 맥락이 훨씬 더 중요하다.

  • working scene

    ©2019 Soonuk Jung. The Carffing Cafe 1
    ©2019 Soonuk Jung. The Carffing Cafe 2

    WordPress 5.0으로 업그레이드하면서 포스팅 앞부분 텍스트 일부가 없어지는 안타까운 일을 겪었지만 한 가지 긍정적인 것은 사진을 손쉽게 full-width로 올릴 수 있게 된 것.

    위 사진은 경기도 용인시 기흥에 위치한 더 카핑 카페의 모습.

  • 고인의 취향

    살아오면서 좋아하게 된 음악이 얼마간 있는데, 그 중 일부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Astor Piazzolla, Four Seasons of Buenos Aires (Cuatro Estaciones Porteñas)
    Sergei Rachmaninoff, Piano Concertos No. 2
    https://www.youtube.com/watch?v=J12zprD7V1k
    Ludwig van Beethoven, Symphony No. 7, Mov. 2 (Allegretto)

    잠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 보았는데, 내 장례식장에 좋은 앰프와 스피커를 설치해서 위와 같은 음악을 계속 틀어놓으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물론 당사자(나)는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망자를 위해 틀어주는 것은 아니고 ‘고인은 이런 음악을 좋아하셨습니다’라고 조문객들에게 고인의 취향을 공유하는 것이다.

    아주 나쁜 생각은 아닌 것 같지만, 음악적 취향은 대체로 개인적인 것이어서 내가 좋아한다고 다른 사람들도 꼭 마음에 들어하리라는 법은 없으니 괜히 남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말하자면, 조문을 갔는데 배경음악으로 예컨대 홍진영의 “잘가라”나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라트라비아타 중 “축배의 노래”가 흘러나오면 아무리 그것이 고인의 애청곡이었다고 해도 “이게 아닌데”하며 언짢아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사후에 자기 취향을 남에게 강요하기 보다 살아 있을 때 자기나 실컷 듣는 것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기

    워드프레스를 5.0으로 업그레이드했더니 기존 블로그 포스트 텍스트의 앞부분 일부가 사라져버리는 현상이 발생했다. 모든 포스트가 그런 것도 아니고 사라진 텍스트의 분량도 일정하지 않아서 도대체 어떤 이유로 사라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어떤 포스팅은 제목만 남기고 내용 전체가 사라진 경우도 있다. (예: 2015년 1월 15일자 포스팅 “obligation to write“)

    과거 포스팅을 읽다가 내용이 왠지 어색하다면 문장 앞 부분이 사라져서 그런 것이다.

    (그 외에도 문단이 합쳐진다거나 사진의 위치가 달라지는 등의 문제도 있지만 텍스트가 사라진 것에 비하면 약과다.)

    과거의 백업 파일을 참조해서 일일히 복구할 수는 있겠지만 900개 가량의 포스팅을 하나씩 살펴가며 고치려니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불완전한 대로, 부족한대로 받아들이고 살아야할까보다 생각 중이다.

  • 차를 마시는 방법

    작업 중에 한숨 돌리기 위해 차를 한 잔 마시는 것과 누군가를 만나 차 한 잔 하는 것은 마시는 행위는 비슷하지만 맥락이 크게 다르다.

    혼자 마실 때는 어떻게 하든 상관이 없겠지만 다른 사람과 교제를 하는 맥락에서 차를 마실 때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형식과 작법(作法: 일정한 규칙)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런 작법은 문화권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일본, 중국, 영국, 한국 모두 차를 마시지만 차를 둘러싼 행동 규칙과 형식이 저마다 다르다. 심지어 찻잔을 드는 방식에도 각자의 특징이 존재한다. 예컨대 일본은 전통적으로 찻잔을 두 손으로 들어올리고, 영국은 한 손으로는 찻받침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찻잔을 드는 것이 매너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규칙은 해당 문화에 살아보지 않으면 좀처럼 알기 어렵다.

    그러나 문화를 막론하고 대체로 “차 대접”이라는 형식의 공통점은 각자 알아서 타먹는 게 아니라 누군가 다른 사람이 타준다는 것이 그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카페에서는 바리스타가 그 일을 대신 해준다.)

    그러니까 차 대접을 하면서 “알아서 내려드세요”, “커피는 셀프”하고 하면 일반적인 맥락에서는 굉장히 어색해진다. 식후에 식당에서 마시는 자판기 커피라고 할지라도 누군가가 받아서 쟁반에 갖다주면 그 느낌이 사뭇 다른 것이다.

    “남이 타주는 행위”가 차 대접의 핵심이라고 한다면 대접 받는 사람이 특별히 유의해야 하는 점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차를 타서 내주는 사람의 행동 그 자체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가지는 한편 차의 맛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말아야 한다는 것. 물론 특별히 맛있는 차를 대접받는다면 그 점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말아야하지만 혹시라도 차가 입맛에 맞지 않더라도 차의 맛이 핵심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 Daring Greatly

    넷플릭스에 Brené Brown의 강연 The Call to Courage가 떴다고 해서 들어보았습니다. 그녀의 강연 중, 테어도어 루즈벨트의 말이 인용되고 있어서 그 본문을 공부삼아 우리말로 옮겨 보았습니다.

    “It is not the critic who counts; not the man who points out how the strong man stumbles, or where the doer of deeds could have done them better. The credit belongs to the man who is actually in the arena, whose face is marred by dust and sweat and blood; who strives valiantly; who errs, who comes short again and again, because there is no effort without error and shortcoming; but who does actually strive to do the deeds; who knows great enthusiasms, the great devotions; who spends himself in a worthy cause; who at the best knows in the end the triumph of high achievement, and who at the worst, if he fails, at least fails while daring greatly, so that his place shall never be with those cold and timid souls who neither know victory nor defeat.”

    Theodore Roosevelt (from his speech titled “Citizenship in a Republic,” April 23, 1910)

    “남을 비평하는 사람들은 수에 칠 가치가 없습니다. 힘있는 사람의 실수를 지적이나 하고 실제로 일하는 사람들의 부족함을 들춰내기 급급한 사람들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 인정받아야 할 사람은 경기장 안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얼굴이 흙과 땀과 피에 절은 채 용맹스럽게 수고하는 바로 그 사람 말입니다. 그는 실수도 하고, 거듭 실패합니다. 모든 노력에는 실수와 부족함이 따르기 마련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는 실천을 위한 수고를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위대한 열정과 헌신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가치있는 명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마침내 그는 큰 성취의 영광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실패하더라도 적어도 그는 대담한 시도를 하다가 실패하는 것이기에 그는 승리도 패배도 알지 못하는 이 열정 없는 소인배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테오도어 루즈벨트 (1910년 4월 23일에 파리에서 이뤄진 연설 “공화국의 시민” 중에서)

    #번역연습

  • 번역에서 말의 순서에 대하여

    번역을 하다보면 말의 순서와 표현의 미묘한 차이에 대해 신경이 쓰인다. 저자의 문장의 구조를 살릴 것인지, 의미를 살릴 것인지를 놓고 고민이 되곤 한다.

    번역 연구의 자료로 무엇이 좋을까 생각해 보다가 성서가 떠올랐다. 워낙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었고, 그리고 같은 언어 안에서도 여러 번역본이 있어서 비교 연구 자료로서 쓰임새가 많다고 느껴진다.

    예컨대, 시편 122편 1절은 다음과 같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시편 122:1 (개역개정)

    이 문장은 크게 세 단위로 구성된다: (1)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2)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3) 내가 기뻐하였도다.

    같은 구절의 영어 번역 순서는 다르게 구성되어 있다. (1) 나는 기뻤다 (2) 그들이 내게 말했을 때 (3) 여호와의 집으로 들어가자.

    I was glad when they said unto me, Let us go into the house of the LORD.

    Psalm 122:1 (King James Version)

    일본어의 경우 번역본마다 다른데, 新改譯의 경우 우리말 순서와 비슷하다. (1) 사람들이 나에게 (2) 주의 집으로 가자라고 말했을 때 (3) 나는 기뻤다.

    人々が私に、「さあ、【主】の家に行こう」と言ったとき、私は喜んだ。

    詩篇122: 1 (新改譯)

    한편, 일본어 新共同譯의 순서는 (1) 주의 집에 가자 (2) 라고 사람들이 말했을 때 (3) 나는 기뻤다

    主の 家に 行こう, と 人々が 言ったとき /わたしはうれしかった.

    詩篇122: 1 (新共同譯)

    중국어 Union Version도 우리말 순서와 같다. (1) 사람들이 내게 말했다 (2) 여호와의 전으로 가자 (3) 나는 기뻤다.

     人对我说,我们往耶和华的殿去,我就欢喜。

    诗篇 122 (Union Version)

    궁금한 것은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이 세 단위의 순서가 과연 어떻게 되어 있을까 하는 것이다. 문장에는 두괄식도 있고 미괄식도 있는 것이니 맨 앞에 나오는 내용이 꼭 중요한 내용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번역본마다 이렇게 다르니 어쨌든 이 시의 저자는 세 단위 중 무엇을 맨 앞에 두었을지 궁금했다.

    히브리어 성경 풀이를 참조해 보았더니 원문의 순서는 영어와 같았다. 즉, (1) 나는 기뻤다 (2) 사람들이 말했을 때 (3) 여호와의 집으로 가자.

    이미지: https://www.ancient-hebrew.org/hebrewbible/Psalms_122.html

    원문처럼 “나는 기뻤다”를 맨 앞에 둔 것은 감정의 표현(expression)에 가깝고, 우리말 번역처럼 “나는 기뻤다”를 맨 뒤에 둔 것은 상황 설명(explanation)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히브리어 원문과 영어 번역에서는 “나는 기뻤다”라는 개인의 감정 표현이 먼저 언급되는 반면, 한국어, 일어, 중국어에서는 나의 감정보다 주변 사람들의 행동이 먼저 언급된다. 문화에 따라 개인의 감정과 주변의 상황 중에서 어느 쪽에 더 무게를 주는지가 번역의 차이에서 드러난다고 볼 수도 있을까?

    번역시 문장 구조의 차이를 나타내는 또 하나의 예는 신약 마태복음 5장의 팔복의 경우. 우리말 번역은 (1) 어떠어떠한 자는 (2) 복이 있다 로 되어 있는 반면, 그리스어 및 영어 성경은 (1) 복되도다 (Blessed are…) (2) 어떠어떠한 자여 의 구조로 되어 있어 말의 순서가 주는 느낌이 미묘하게 다르다.

    #번역공부

  • typical site maintenance failures

    soonuk.com 사이트의 php 버전을 5.1x에서 7.3으로 올렸습니다. WordPress 5.1에서 5.2로 업데이트하려면 php 버전이 최소 5.2는 넘어야한다고 해서 그랬습니다. 그 과정에서 데이타베이스 백업 및 복구가 필요했는데 이 작업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미지 링크, youtube 링크 등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또한 WordPress 4.x 버전 이하 (Classic) 코드와의 호환성에 문제가 있어 사이트가 살짝 이상해졌습니다.

    soonuk.com 을 운영해 온 동안 계속 겪은 문제인데, 결국은 제게 사이트 관리의 전문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참에 사이트 전체를 개편해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