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이정표를 남기는 Annual Award 2017을 발표합니다.
저는 Annual Award에 다음 세 가지의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1) 기억 (2) 추천 (3) 음미(appreciation). 제 기억력은 계속 나빠지는데 특히 시간의 흐름에 관한 기억이 안 좋아서 특정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지 잘 생각해내지 못합니다. 예컨대 어딘가 여행을 다녀온 것이 몇 달 전이었는지 몇 년 전이었는지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번 해에 있었던 중요한 일들 중 특별히 기억해 두고 싶은 것을 기록해 두려 합니다. 또한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해에 발견한 추천할만한 물건이나 경험을 공유하려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일상적으로 접하는 생활 주변에서 그 해에 특별히 의미있게 경험한 의미를 음미해보고 기념하려 합니다.
2017년은 마음이 여유롭지 못해 원래 예정했던 발표 일정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한꺼번에 다 올리지 못하고 시간이 나는대로 조금씩 추가하려고 하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럼 올해의 Annual Award를 소개합니다:
Milestone of the Year: The Passing Away of My Father
2017년 9월 4일, 만 83세를 일기로 아버지께서 이 땅에서의 긴 여정을 마치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셨습니다. 많은 분들의 위로와 도움 속에서 장례를 무사히 마치고 아버지의 유해를 고향인 구미 선산에 안장하였습니다. 장례 이후 3개월이 지난 시점에도 저는 여전히 경황이 없고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갈피를 잡기가 어렵습니다. 아마도 시간이 더 흘러야 이 시기의 의미를 차분하게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장례 기간 중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보내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Book of the Year: 밥 고프, 사랑으로 변한다
2017년 올해의 책은 밥 고프(Bob Goff) 지음, 최요한 옮김, “사랑으로 변한다(Love Does)” (아드폰테스 2012)입니다. 저자가 직접 읽어주는 오디오북으로 읽었는데 너무너무 재미있어서 다시 번역서로 읽었습니다. 저자에 대해서는 도널드 밀러의 책 “천년 동안 백만 마일“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미국의 변호사인데 모든 선입견을 뛰어넘는, 온갖 기상천외한 이야기의 연속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습니다.
저는 유익하게 책은 ‘한 번 더 읽어야겠다’라고 생각하며 책꽂이에 꼽아두고, 재미있게 읽은 책은 읽고 난 책을 가까운 지인에게 건네 주고, 아주 특별한 책은 몇 권을 더 사서 지인들에게 나눠주곤 했는데 밥 고프의 『사랑으로 변한다』가 여러 권 사서 나눠준 책에 해당됩니다. 저에게는 그만큼 의미있는 책이었습니다. 저자의 새 책이 2018년 초에 출간된다고 해서 잔뜩 기대하고 있습니다.
Runner-Up : 칼 뉴포트 지음, 김태훈 옮김, 딥 워크 (민음사 2017) – 지인의 추천으로 읽었는데, 지적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하도록 엄격하게 집중력을 다스리는 법을 가르쳐 준 책입니다. 업무 중에 핸드폰을 꺼두는 등의 요령을 배워서 실천해 보았더니 확실히 생산성이 커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Future Candidates : Lewis Hyde의 The Gift와 William Bridges의 Transitions 도 강력한 후보작이지만 끝까지 읽지 못해서 이번 해에는 수상작으로 채택하지 않았습니다.
Gadget of the Year: Bose QuietComfort 35
소음제거(noise-cancelling) 헤드폰을 대표하는 Bose QuietComfort 시리즈는 십 여 년 전부터 관심을 두고 있었지만 워낙 가격대가 높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2017년 5월, 미국 출장 중에 귀를 완전히 덮는 형태인 QC35를 과감히 구입하였습니다. 소음제거 헤드폰은 일정하게 반복되는 소음 진동을 상쇄시켜 비행기나 자동차 엔진 등의 웅웅거리는 소리를 들리지 않게 해줍니다. 저는 용인과 서울을 오가는 출퇴근 좌석버스에서 팟캐스트, 오디오북, 음악 등을 들을 때 이 헤드폰을 매우 유용하게 잘 사용했습니다.
Project of the Year: 오르빛/Orbitt
지인의 소개로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주관하는 4개월짜리 교육 프로그램 콘텐츠테크랩의 “라이프디자인랩”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콘텐츠인재캠퍼스에서 제공하는 여러 도구와 재료를 접해보고 다양한 배경을 가진 참가자들과 협업할 수 있었다는 점이 매우 유익했습니다. 저는 랩마스터인 장영진 대표의 친절한 지도 하에 반응형 조명 장치의 프로토타입을 만들었습니다. 단일보드 마이크로컨트롤러인 아두이노에 가속센서 MPU-6050와 LED 유닛인 네오픽셀(neopixel)을 연결하고, 움직임에 반응하여 따뜻하게 이글거리는(flickering) 느낌의 불빛을 내고, 움직임의 지속 시간에 비례해서 불빛이 천천히 사그러지도록 프로그래밍하되 사용자의 신체성과 교감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만들어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쥐불놀이를 전자적으로 재현하는 모양새였다가 점차 사진에서 보듯 궤도(orbit)를 따라 도는 행성인 토성(Saturn)을 연상시키는 형태로 발전했습니다. 이 물건의 이름을 뭘로 할까 논의하면서 결국 『오르빛(Orbitt)』이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짓고 나서 찾아보니 “오르”는 히브리어로 “빛”을 뜻한다고 하네요.
Runner-up :Board Essentials 번역 – 평소 비영리단체의 경영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있던 차에 국제CBMC 활동을 오래 하신 한 분이 David L. Coleman이 지은 Board Essentials라는 책의 번역을 맡겨주셔서 한 달 여에 걸쳐 번역했습니다. 여러 사정이 있어 출판은 요원해 보이지만 덕분에 이사회가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지 그 원리를 배울 수 있어서 무척 유익했습니다.
TV Program of the Year: Designated Survivor
미국 ABC방송사에서 2016년 9월에 방영을 시작한 서스펜스 드라마 『지정생존자(Designated Survivor)』를 무척 즐겁게 보았습니다. 저는 원래 TV를 즐겨 보지 않아 집에 케이블TV조차 신청하지 않고 있는데 오로지 이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 넷플릭스 서비스에 가입했습니다. 미국 정부의 연두교서 발표장에 테러가 일어나 국무위원 중 한 사람만 남기고 모두 사망하는 바람에 생존한 국무위원인 주인공이 하루 아침에 대통령이 되어 온갖 난국을 수습해 나간다는 이야기입니다. Fox 네트워크사의 서스펜스 드라마 『24』의 주연 배우 Kiefer Sutherland가 주연을 맡았는데 이 두 드라마의 공통점은 극중 인물들이 뭔가 중요한 일을 해결하려는 상황에서 가족과 관계된 문제가 발목을 잡는다는 설정이 심심찮게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실감이 납니다.
Runner-Up :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일명 “알쓸신잡”) – 다방면에 교양이 풍부한 출연자들이 여행을 다니면서 식사 중에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2017년 동안 아내가 매우 즐겨 보았던 교양 프로그램입니다. 덕분에 국내 여행지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Everyday Goods of the Year: Disposable Plastic Gloves
짐을 옮기거나 청소를 할 때 손을 지켜주는 매우 유용한 폴리에틸렌 재질의 일회용 위생장갑을 올해의 일용잡화로 선정했습니다. 메이커나 브랜드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일반 상품(commodity)이긴 하지만 조금이라도 값이 더 나가는 제품이 잘 찢어지지 않고 오래 쓸 수 있습니다 (특히 3M 브랜드가 질깁니다). 위 사진에서 보는, 다이소에서 판매하는 제품의 경우 70매 들이에 1000원이므로 좌우 한 짝에 약 30원 꼴입니다. 손을 긁힘, 오염 등으로부터 보호해 주기 때문에 부엌, 차량, 사무실 책상 등에 비치해 두고 잘 사용했습니다.
Museum of the Year: 온양민속박물관
원래 12월에 경험한 내용은 Annual Award에 잘 선정하지 않지만 온양민속박물관은 워낙 좋은 경험을 선사하였기에 특별히 올해의 박물관으로 선정했습니다. 이 박물관을 나타내는 키워드는 “탁월하고 세련된 정보 디자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린이 백과사전을 편찬한 바 있는 계몽사의 김원대 회장이 1978년에 세운 이 박물관은 전시 주제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고, 개별 전시품에 대한 공들인 설명이 남다릅니다. 역사학을 전공한 친구에 따르면 아는 사람의 설명을 들으면서 보면 훨씬 더 흥미진진하다고 합니다.
이 박물관을 방문하고 얼마 후에 한 지방자치단체의 박물관을 관람했는데 후자의 경우에서 “컨텐츠의 빈곤”이란 어떤 것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각자의 설립 배경이 다른만큼 서로를 저울질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정보의 디자인을 어떻게 하면 더 좋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자극이 된다는 의미애서 두 박물관을 비교해 본 것이 유익했습니다.
Online Service of the Year: Instagram
소셜네트워크 서비스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습관을 반성하면서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을 한동안 사용하지 않고 지내다가 인스타그램은 다시 사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인스타그램 계정을 한번 삭제했더니 그 사이에 다른 사람이 기존 아이디를 가져가 버렸더군요. 그래서 아이디를 @soonuk.jung 으로 바꾸어 다시 시작했습니다. 소셜네트워크를 그다지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편은 아니지만 2017년 동안 집중적으로 사용한 것이 인스타그램이어서 올해의 온라인 서비스로 선정했습니다. 특히 손으로 쓰는 플래너 사례를 실컷 볼 수 있어서 즐겁습니다.
Runner-up :Youtube – 벅스뮤직이나 아이튠즈 뮤직스토어에서도 찾을 수 없는 오래된 앨범, 그리고 C. S. 루이스, 피터 드러커, 벅민스터 풀러와 같은 존경하는 저자들의 육성 녹음이나 강연을 들을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서비스입니다.
Dish of the Year: 우래옥 본점의 김치말이냉면
가까운 어른의 초대로 을지로에 있는 우래옥 본점에서 김치말이냉면을 먹어보고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깔끔한 참기름 냄새가 감도는 동치미 국물이 일품입니다. 양도 많습니다. 우래옥 메뉴 대부분은 내용에 비해 너무 비싸다는 느낌이 들지만 김치말이냉면만큼은 가격 대비 만족도가 매우 높았습니다. 특히 냉면 밑에 밥이 깔려 있음을 알았을 때의 느낌은 뭔가를 덤으로 받은 것처럼 기뻤습니다. 반찬으로 나오는 겉절이와 무채도 다른 곳에서 맛보기 어려운 훌륭한 맛입니다.
Cafe of the Year: Add Coffee
제가 커피가 특별히 맛있다고 느끼는 카페는 대략 세 군데인데 그 중 2017년 Cafe of the Year로 Add Coffee 라는 이름의 카페를 선정하였습니다. 같은 프릳츠 커피 원두를 사용하더라도 이 가게에서 내놓는 커피는 더 맛있게 느껴졌습니다. 제 입맛에는 프릳츠 커피 본점보다 더 맛있었습니다. 인테리어도 특별하고 매장에서 직접 구워내는 브라우니도 맛이 깊습니다. 마침 우래옥 바로 옆에 있습니다.
Podcast of the Year: Typology Podcast
에니어그램을 소개한 책 Road Back to You (역서: 이안 모건 크론, 수잔 스테빌 지음, 강소희 옮김, 『나에게로 가는 길』, 두란노 2017)의 저자 이안 모건 크론이 진행하는 본격 에니어그램 전문 온라인 대담 프로그램 Typology Podcast가 올해의 팟캐스트입니다. 1번부터 9번까지, 각 에니어그램 유형에 해당하는 손님을 초대하여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하는데 각 유형별 특징을 이해하는 데 많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Epilogue
2017년에는 뜻깊은 우연한 만남(serendipity)이 특별히 많았습니다. 연관된 분들의 실명을 밝히기는 곤란하므로 Serendipity of the Year 항목은 제 마음 속에만 간직하려 합니다.
2018년에는 더욱 새로운 모습으로 여러분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이제까지의 Annual Award는 다음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