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soonuk2

  • chronology

    존 러스킨 지음, 곽계일 옮김,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아인북스) 부록에 나오는 존 러스킨의 연표를 보면 그의 생애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청년시절 좋아했던 여성(Adele Clothilde Domecq)과는 어머니의 반대로 결혼하지 못했으며, 결국 아내가 된 사람(Effie Gray)과는 결혼 6년만에 파경을 맞고, 이혼 후에 자기보다 한참이나 나이 어린 여성(Rose La Touché)에게 구혼했다가 거절당한다. 그리고 존 러스킨은 노년에 정신착란을 겪는다. 이걸 보고 생각해 보았다. 만약 개인의 이력서에 좋은 일과 안 좋은 일을 모두 적는다면 얼마나 이야기가 파란만장할까? 여러 가진 면에서 뛰어난 인물도 항상 좋은 일만 겪었으리라는 보장이 없으니 말이다.

    “야곱이 바로에게 대답하였다.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가 백 년 하고도 삼십 년입니다.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 창세기 47:9 (새번역)
    – – – – – 참고 1: 구직 이력서에 안 좋은 경험을 적는 가상의 예:
    • “어린시절부터 저의 집에서는 가정불화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지간한 갈등상황에서도 동요하지 않는 배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 “제가 살아온 28년 중 4년 가량을 병원에 입원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환자의 고충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 “저는 총 여섯 차례의 교통사고를 당한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경험을 통해 저는 안전에 대한 인식과 위기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남다릅니다.”
    참고 2: 최인 님의 글 “존 러스킨(John Ruskin)의 생애와 철학]]>

  • quote: 존 러스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2)

    감탄하며 읽고 있는 책, 존 러스킨의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비교적 오래 전인 1860년에 쓰여진 책이지만 시대를 관통하는 글쓴이의 통찰력이 놀랍다. 가장 최근에 쓰여진 책이라고 반드시 가장 발전된 생각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님을 느끼게 된다. 지식은 선형적으로 진화하는 것은 아닐지도.

    “따라서 어떤 물건이 쓸모가 있으려면 물건 자체가 지닌 유용한 기능성뿐 아니라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유능한 사람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를 좀 더 전문적으로 표현하자면, 유용성이란 역량있는 사람의 손에 들린 가치인 셈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까지 고찰해 왔듯이, ‘축적’의 관점에서 부를 학문적으로 다룰 때는 물질의 축적만이 아니라 인간 역량의 축적도 그 연구 대상에 포함된다. ‘분배’의 관점에서 부를 학문적으로 다룰 때는 절대적 분배가 아닌 차별적인 분배에 대해, 즉 아무 대상에게 아무 물건을 분배하는 것이 아닌 적합한 대상에게 적합한 물품을 분배하는 법칙에 대해 연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를 연구하는 학문은 단순한 산술 계산 그 이상을 요구하는 고난도의 학문인 것이다.” — 존 러스킨 지음, 곽계일 옮김,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아인북스, p164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수요 중에 75%는 환상과 이상, 희망과 애착에서 비롯된 낭만적인 것들이다. 즉, 돈지갑을 단속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상상력과 감정을 단속해야 한다는 뜻이다.” (Three-fourths of the demands existing in the world are romantic; founded on visions, idealisms, hopes, and affections; and the regulation of the purse is, in its essence, regulation of the imagination and the heart.) — 같은 책, pp174-175
    “생산물은 노동의 결과로 만들어진 물건이 아니라 유용하게 소비할 수 있는 물건을 뜻한다. 그렇기에 국가가 대답해야 할 질문은 ‘얼마나 많은 노동자를 고용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생명을 잉태해 내는가’이다. 그 이유인즉, 소비야말로 생산의 목적이자 열매이고, 생명이야말로 소비의 목적이자 열매이기 때문이다.” (Production does not consist in things laboriously made, but in things serviceably consumable; and the question for the nation is not how much labour it employs, but how much life it produces. For as consumption is the end and aim of production, so life is the end and aim of consumption.) — 같은 책, p195
    “”생명이 곧 부(富)다.” 이 생명은 사랑과 환희와 경외가 모두 포함된 총체적인 힘디ㅏ. 가장 부유한 국가는 최대 다수의 고귀하고 행복한 국민을 길러 내는 국가이고, 가장 부유한 이는 그의 안에 내재된 생명의 힘을 다하여 그가 소유한 내적, 외적 재산을 골고루 활용해서 이웃들의 생명에 유익한 영향을 최대한 널리 미치는 사람이다.” (THERE IS NO WEALTH BUT LIFE. Life, including all its powers of love, of joy, and of admiration. That country is the richest which nourishes the greatest number of noble and happy human beings; that man is richest who, having perfected the functions of his own life to the utmost, has also the widest helpful influence, both personal, and by means of his possessions, over the lives of others.) — 같은 책, pp195-196
    19세기에 쓰여진 난해한 영어 본문 문장과 비교해 보니 옮긴이인 곽계일 님의 공들인 번역에 대한 고마움이 새삼 깊이 느껴진다.]]>

  • on forgetfulness and reading

    “”Therefore everyone who hears these words of mine and puts them into practice is like a wise man who built his house on the rock. The rain came down, the streams rose, and the winds blew and beat against that house; yet it did not fall, because it had its foundation on the rock” — Matthew 7:24-25 ]]>

  • quote: 존 러스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난 단지 뼈 없는 인간을 가정한 체조학에 관심이 없듯이 영혼 없는 인간을 가정한 경제학에 관심이 없을 뿐이다.”

    — 존 러스킨 지음, 곽계일 옮김,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아인북스, p27

    “자신이 죽어야 할 때를 모르는 사람은 진실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같은 책, p56

    “무엇보다 학교를 개혁하자, 그러면 감옥을 개혁할 필요는 자연히 사라질 것이다.”

    — 같은 책, p76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의 책을 서점에서 우연히 집어들게 되었다. 존 러스킨…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인데 누군지도 모르고, 어떤 내용의 책인지도 모르고, 단지 마태복음 20장 14절을 제목으로 사용했다는 점이 흥미로워서 아무런 선입견 없이 일단 읽기 시작했는데 매우 감명깊다. 번역도 잘 되어 있고 각주에 등장하는 옮긴이의 공들인 해석도 읽는 재미를 더한다.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 마태복음 20:14
  • design of spaces: 명동성당

    myungdong_cathedral_brochure 명동성당 지하에 새로운 공간이 생겨났다. 놀랍다. 한번 가보시길. 추천.]]>

  • 파트릭 모디아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나의 독서취향은 노벨문학상과는 대단히 거리가 멀다. 1901년 첫 수상자인 프랑스의 쉴리 프리돔 이후 백 여명에 달하는 노벨문학상 수상 대상작가의 책 중 내가 제대로 읽어본 것은 1962년 수상자인 존 스타인벡의 “진주“와 “생쥐와 인간” 뿐이었다. 최근, 독서모임에서 선정도서로 정해진 덕분에 또 한 명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책을 읽어보게 되었다. 2014년 수상자인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문학동네). 아니나 다를까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겠다. 프랑스와 관련된 지리적, 역사적 배경 지식이 없는데다가 등장인물의 생소한 프랑스식 이름도 잘 기억되지 않는 것도 이유일 듯. 추측하건데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지명이나 각종 소재가 이야기에 질감을 더해주는 중요한 문화적 상징성을 가지고 있을 것 같은데 나로서는 전혀 파악되지 않았다. 예컨대 등장인물들이 “므제브로 갔다”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Megeve가 프랑스 동부 알프스에 위치하여 이태리와 스위스 국경에 인접한 곳의 지명이며, 웅장한 세 개의 산맥에 둘러싸여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키장이 있는 휴양지라는 곳을 모르면 그 뜻이 잘 전달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읽은 번역본에는 각주 설명이 많이 나오지 않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것도 나쁘지 않은 결정–옮긴이와 출판사의–이었다고 느껴진다. 어떤 문학 작품의 경우, 이해보다는 경험이 더 중요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어려운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라고 느낄 수 있는 것 자체가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진면목을 발견하는 하나의 훌륭한 경험–humbling experience–일 수도 있다. 사람은 이해를 통해서 생각이 자라고 경험을 통해 감수성이 자라난다. 이탈로 칼비노의 저서 “보이지 않는 도시들“을 읽을 때도 그랬지만, 멋진 문학작품을 읽고 나면 비록 이야기는 이해되지 않았지만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생각하는 관점이 어딘지 모르게 달라짐을 느낀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도 그랬다. 이 책은 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이 자신의 과거를 되찾기 위한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결국 그 과거가 그렇게 의미심장한 것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생각해 보면 당시에는 진지했던 경험도 지나고 나면 잘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희미해지는 경험을 하곤 한다. 우리의 과거도 일부러 기억해내지 않으면 그저 희미한 망각 속에 묻혀 있을 따름. 완전히 잊혀진 것이나 그저 기억하지 않는 것이나 거기서 거기인 셈이다.

    “한 인간의 삶으로부터 남는 것은 무엇일까? 저마다 세계의 중심이라고 여기는 이 따뜻한 체온의 ‘나’로부터 결국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빈 과자통 속에서 노할게 바래져가는 몇 장의 사진들, 지금은 바뀌어버린 지 오래인 전화번호들, 차례차례로 사라져가는 몇 사람의 불확실한 증인들…… 그리고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 그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하기나 했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어질 때까지, 우리가 이 땅 위에 남기는 그 자취의 보잘 것 없음 혹은 ‘무(無)’, 혹은 흩어지는 구름 같은 헛됨을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담담한, 그래서 더 절실한 목소리로 서술함으로써 파트릭 모디아노의 최대의 걸작을 만들어낸다.” —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문학동네), p265 (옮긴이 해설 중에서)
    열심히 살았지만 남는 게 없다라고 탄식하는 전도서의 저자의 이야기와 맞닿아 있다.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일들이 있나니 그것들이 사람에게 무슨 유익이 있으랴.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를 누가 알며 그 후에 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 — 전도서 6:11-12
    하지만 돈이 없어서 간식을 사먹지 못하는 느낌과 돈이 있지만 스스로 절제해서 간식을 사먹지 않는 느낌은 상당히 다른 것처럼 기억해 내고 싶어도 생각이 나지 않거나 과거의 기록을 모두 잃어버려서 과거를 잃어버리는 것과 일기장에 다 기록되어 있지만 굳이 펼쳐보고 과거를 회상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느낌이 다르다. 절박함 속의 체념과 여유로움 속의 단념의 차이를 남들은 몰라도 본인은 느낄 수 있다. 기억할 수 있는 것은 그대로 이를 기념하고 어쩔 수 없이 잊혀져 버리는 것은 그대로 받아들이자. 마침 창 밖에 가을 단풍이 자신은 곧 낙엽으로 떨어져 잊혀질 존재임을 말해준다. – – – 참고: 갈매나무 님의 블로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 기본덕목(Cardinal Virtues)

    “기본이 안 되어 있다”라는 표현에 대해 생각하다가 결국 사람이 갖춰야 하는 “기본”이란 과연 무엇일지 궁금해졌다.

    위키피다아에 따르면 서양 고전에서 말하는 네 가지의 기본덕목(cardinal virtues*)은 prudence, justice, temperance, courage 이다. 위키피디아의 설명과 C.S. Lewis의 책 Mere Christianity(순전한 기독교)에서 이 네 가지를 설명하는 부분을 참고해서 각각을 풀이하자면 다음과 같다.

    • prudence: 주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하는지 아는 센스, 사리분별, 지혜, 상황판단력.
    • justice: 공평함. 성실성, 약속을 지키는 것. 정직.
    • temperance: 자제력. 자신이 그만둬야 할 때를 알고 그만둘 수 있는 능력. 금욕주의와는 개념이 약간 다르다.
    • courage 또는 fortitude: 두려움, 불확실성, 위협에 맞서는 용기. 꿋꿋함. 배짱(guts)

    일상에서 말하는 “기본이 안 되어 있다”라는 표현을 서양의 기본덕목에 견주어 해석하자면 “상황파악이 안되고, 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공평함에 대한 인식이 모자르며, 자기 스스로를 절제하지 못하고, 뻔뻔스럽다”라는 뜻이 되지 않을까 싶다. 센스, 공평성, 자제력이 결여된 꿋꿋함은 용기가 아니라 뻔뻔함이다. 서양의 기본 덕목 네 가지가 위와 같다면 동양에서 기본 덕목으로 치는 것은 어떤 것일까? 유교의 오륜(五倫)을 기준으로 한다면 다음과 같다:

    • 父子有親(부자유친): 어버이와 자식 사이에는 친함이 있어야 한다.
    • 君臣有義(군신유의):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로움이 있어야 한다.
    • 夫婦有別(부부유별): 부부 사이에는 구별이 있어야 한다.
    • 長幼有序(장유유서):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어야 한다.
    • 朋友有信(붕우유신): 친구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오륜에 흐르는 정신을 나름대로 요약하자면 관계에 대한 존중, 위아래에 대한 존중, 위계질서에 대한 존중, 동료 간에 약속을 지키는 것 등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 동양의 덕목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기본이 안 되어 있다”라는 표현은 “자기 분수를 모르고 선배, 웃어른, 동료를 존중함이 없이 자기 좋을대로만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지 않을까 싶다. 서양과 동양의 기본 덕목을 하나로 묶어 생각하면 사람이 마땅히 갖춰야 하고 부모가 자녀에게 심어줘야 하는 기본의 핵심은 “상황을 인식하는 지혜와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기본은 결국 황금률**에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 마태복음 7:12

    – – – *참고: Cardinal이란 단어는 “경첩”이란 뜻의 어원에서 나왔는데 중추적 역할을 한다는 의미가 된다. 천주교의 추기경을 Cardinal이라고 부르는 것도 교회 조직 내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중요한 인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cardinal virtues라고 한다면 사람으로서 갖춰야 하는 기본적이고도 중추적인 덕목을 말한다. **황금률은 자신만 생각하는 개인주의도 아니고, 타인이나 사회의 기준만을 생각하고 이에 종속되는 전체주의도 아닌, 자기 자신과 함께 다른 사람도 동시에 같이 생각하는 쌍방향적 평형의 개념을 담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남이 나에게 어떻게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주관적 기대를 다른 사람에게 투사해서 남을 향한 자신의 행동의 기준으로 삼으려면 고도의 지적, 감성적 능력에 덧붙여 상당한 의지력을 요구하지 않을까? 기본을 갖춘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 기본의 기준

    기본이 안 되어 있다“는 표현을 쓰곤 하는데 최근 신성대씨의 저서 “품격경영“을 읽고 나니 바로 나 자신이 기본이 상당히 안 되어 있다는 자각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해서 몇 가지 질문:

    1. 여기서 말하는 “기본”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2. 사람들이 말하는 “기본”에는 서로 수긍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객관적 기준이 있는 걸까? 아니면 각자 주관적으로 다른 기준을 가진 것일까?
    3. 일단 기본이 안 되어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할 때, 과연 그런 사람은 자신의 기본 부족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을까? 유명 강사 김창옥씨의 표현에 따르면 또라이는 자신이 또라이인줄 모르고, 자기가 또라이인줄 아는 사람은 또라이가 아니라고 하는데 기본이 안 된 사람의 자기 인식 능력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4. 기본이 안 되어 있는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주변 사람들이 스트레스로 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실질적 대안은 무엇일까?
    5. 자신이 책임지는 사람들(학생, 자녀, 부하직원)이 “기본이 안 된 사람”이 되지 않도록 지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6. 아무리 가르치고 훈육해도 기본이 갖춰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선천적으로 결정된 “타고난 취약성” 또는 “사회성 장애“로 간주하고 특이하나마 그 사람 고유한 개성으로 존중하고 수용하려 애써야하는가?
    7. 기본이 안 되어 있다는 것은 당사자 본인의 책임인가 아니면 그 부모의 책임인가? 아니면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닌 것일까?
    8. 나 자신이 기본이 되어 있는 사람인지 안 되어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9. 자신이 기본이 갖춰져 있지 않은 사람임을 깨달은 순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린 시절부터 성숙한 어른들의 지도하에 오랜 기간에 걸쳐 익혀왔어야 하는 기본을 뒤늦게나마 갖춰나가려면 깨달음만으로 되는 것은 아닐텐데 구체적으로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할까? 강상구 지음 “어려울수록 기본에 미쳐라” 같은 책을 읽으면 과연 도움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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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tumn rain

    autumn_rain 가을을 영어로 autumn 이라고도 하고 fall 이라고도 하는데 가을비를 말할 때는 왠지 fall rain 보다 autumn rain 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어울리는 듯. 왜일까? Fall rain이 어색한 이유는 rainfall (강우)라는 표현과 상충되기 때문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