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soonuk2

  • 존재의 양식

    몇일 전, 어느 개인 병원 대기실에서 “서랍 안에 녹차, 둥글래차, 커피 있습니다^^*”라고 쓰인 서랍 안에 이런 저런 것 들이 널부러져 있는 모습을 보고 놀랐었다. 혹시 어떤 변화가 있는지 현장에 다시 가 봤는데 이번에는 또 다른 모습으로 물건들이 들어있었다. expectations_22 생각해보니 겉에 쓰인 문구가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런 녹차, 둥글레차 등이 서랍 안에 있는 것은 맞는데 다만 그 존재의 양식이 문제였던 것이다. 가지런함, 단정함, 정돈된 질서와 같은 양식이 결여된, 그저 존재하는 녹차, 둥글레차, 커피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손님이 알아서 뒤져서 찾아먹는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셀프 서비스인지도. 미용실, 병원, 은행 등 방문객의 대기가 이뤄지는 곳에 잡지를 비치하는 경우, 과월호가 비치되어 있는 것과 최신호가 비치되어 있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간혹 1-2년 지난 잡지를 비치하는 병원은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 잡지를 비치한 것인지 궁금하다. 마치 손님에게 다 식어버려 미적지근한 커피, 탄산가스가 다 빠져버린 청량음료를 대접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같은 잡지라도 여러 사람이 돌려 읽어 표지가 너덜너덜해진 상태의 잡지와 비닐이라도 씌워 깨끗한 상태로 유지된 잡지도 서로 다르다. 손님에게 차를 대접할 때 종이컵에 내놓는 것과 유리잔/사기잔에 내놓는 것도 다르고 찻잔을 받쳐 내놓는지 여부에 따라서도 느낌이 다르다. 존재와 양식은 어떤 관계에 있어야 할까? 때론 존재 자체로 충분할 때도 있다. 아니 어떤 경우에도 존재가 우선이다. 그러나 존재가 기정 사실화 되면 양식의 문제가 대두된다. 예컨대, 아기가 태어날 때면 부모는 제발 건강하게만 태어나기를 기도하는데 태어나고 나서는 건강한 것만으로는 만족을 못한다고 미국의 아동심리학자 James Dobson 박사는 그의 책 Hide or Seek 에서 비꼬았다. 지나친 양식미의 추구가 일본 공무원 사회의 병폐 중 하나라고 지적한 이도 있는데, 양식이 너무 허접해도 문제, 양식미의 추구가 지나쳐도 문제라면 적절한 수준의 양식은 무엇일까? ]]>

  • Design of Expectation

    인구 밀집 지역에 개인 병원이 몰리면서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인테리어에 많은 공을 들이는 추세가 역력하다. 대부분의 병원 인테리어는 홍보 영상을 보여주는 벽걸이형 평면 텔레비젼, 안락한 소파, 커피 테이블, 잡지꽂이, 음료 테이블, 그리고 간혹 유아를 위한 장난감과 놀이시설 등으로 이뤄져 있다. 각자 개성있는 인테리어를 추구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서로 대동소이한 포맷으로 구성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유행이란 것이 그런 것인지도. 남들과 다른 모습이 되고 싶은데 결국은 비슷한 모습이 되어 가는 현상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어딜 가나 유사한 포맷으로 구성되어 있으면 인테리어 업자도 작업이 수월하고, 병원을 방문하는 환자도 비교적 쉽게 상황에 적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의례히 어떤 편의시설을 기대할 수 있으리라는 심리적 모델이 형성되면 매번 새로운 의사결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상황을 퍼즐을 풀어나가듯 즐기는 사람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익숙한 것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전형적인(typical) 것”이 반드시 부정적이지는 않은 것이다.

    한편 참신한 것을 기대하는 경우가 따로 있다. 관광지에서 랜드마크를 방문하는 경우와 같이 상징적 개성이 강한 경험에서는 참신성을 기대한다. 유명한 브랜드라고 해서 웃돈을 주고 구입했다면 적어도 포장방법이라도 남다른 점이 있어야 제값을 했다는 느낌을 준다. 핫플레이스라고 애써 방문했는데 동네 까페와 다를 바 없으면 실망하기 마련이다.

    병원의 디자인은 참신성과 익숙함이 적절히 조화되어야 한다. 예컨대 건강검진이나 치과 스케일링과 같이 주기적 방문이 요구되는 경우, 새롭고 긍정적인 기대감을 갖도록 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갈 때마다 서비스가 개선되어지는 것을 느끼고 새롭고 신선한 영감(inspiration)을 제공하는 의료 서비스는 공중보건에 좋은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본다.

  • The Power of Detail

    어느 개인 병원에서 목격한 음료대 (amenities booth). “서랍 안에 녹차, 둥글레차, 커피 있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일반적으로 녹차, 커피 등은 탁자 위에 놓여있는 경우가 많은데 서랍 안에 들어있다고 해서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무엇이 들어있을까 궁금해서 열어본 순간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expectation_2

    강남대로에 위치한 나름 이름 있는 개인 병원인데 이럴수가. 손님이 뜸한 오전 시간이라 직원들은 비교적 한가하게 데스크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아 바빠서 정리를 못한 것은 아닌 것 같았고, 향초가 널부러져 있는 모습으로 보아 방치된지 시간이 꽤 흘렀다는 인상을 주었다. 자세히 보면 드러눕기 십상인 녹차 봉지를 깔끔하게 정리할 바구니 자체가 없는 걸로 보아 애당초 차와 커피를 깔끔하게 제공할 의도가 불확실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병원의 인테리어는 전형적인 구성으로 깔끔하게 갖춰졌는데 환자와의 중요한 접점인 음료대의 모습이 이런 식으로 관리된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지 궁금했다. 작은 디테일이 조직의 인상을 좌우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음료대 관리가 방치된 이유는 (1) 역할 지정과 (2) 확인 책임이 분명하게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작은 병원이라도 신경쓸 일이 많고 대체로 인력 부족으로 모두 정신 없이 바쁘기 때문에 자기 일이라고 분명하게 정해져 있지 않은 구석은 방치되기 십상이다. 다만 조직에서 역할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업무를 우선 다루다 보면 사소한 요소는 간과되기 쉽다. 조직 내에서 사소한 디테일까지 놓치지 않고 다루려면 어떤 장치가 필요할까?

  • 이석증(耳石症)

    아침에 일어났는데 어지러움을 느끼면서 똑바로 걸을 수가 없었다. 누워 있다가 자세만 바꿔도 어지럽다가 이내 안정된다. 치과에 갔는데 좌석이 뒤로 넘어가는 순간 심한 어지럼증이 생겼다가 10초 정도 후에 안정되었다. 원래 그네만 타도 어지럽고 울렁거리는 편인데 갑자기 심해지는 듯 해서 이비인후과를 찾아가기로 했다. 추천을 받을 길이 막연하여 구글 검색에 나오는 병원 중 교통 접근성이 용이한 곳으로 정했다.

    검사를 통해 어지럼증의 원인은 이석증(耳石症)으로 판명되었다. 영어로는 Benign Paroxysmal Positional Vertigo (BPPV; 양성 돌발성 두위 현훈)라고 한다. 이석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빙빙클리닉 윤승일 원장님의 유튜브 동영상 “이석증 증상 및 원인 예방법 검사, 치료법“에 매우 자세하게 설명되고 있다.

    내가 받은 이석증 검사는 눈에 특별한 마스크를 씌우고 상체를 뒤로 제끼는 동작을 하는 것인데 이 마스크에는 특별한 카메라가 달려 있어서 내가 어지러움을 느끼는 동안 눈동자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녹화할 수 있다. 내가 어지럽다고 말하지 않아도 내 눈동자의 움직임만으로 내가 어지럼증을 느끼고 있음을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왔다. (어째서 그런 것인지는 위에서 언급한 동영상을 보고서야 알았다.)

    이석증의 원인은 딱히 무엇이라고 확실하게 말하기 어렵다고 하는데 물리적 충격이나 심리적 스트레스를 원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석증의 치료는 1980년에 치료법을 발표한 John Epley 박사의 이름을 딴 Epley 이석치환술(Epley maneuver)이라는 방법을 사용하는데 의외로 단순하며 96-100%의 치유율을 보인다고 한다. (치료 동영상 참조) 가까운 친척도 이석증으로 강북에 위치한 모 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거기에서는 기계화된 장치를 사용했다고. 치료 방법은 간단해 보이지만 문제가 생긴 쪽이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본인 스스로는 알기 어렵기 때문에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본다.

    치료 후 하루 동안은 목을 갑자기 돌리거나 숙이는 등의 움직임을 피하라는 안내를 받았는데 그걸 지키는 것이 의외로 어렵다. 어쨌거나 잘 해결되어 감사하다.

    참고: BPPV에 대한 학술논문 – 변재용, 류은웅, 양성돌발성두위현훈의 진단과 치료 (pdf), Research in Vestibular Science, Vol. 9, Suppl. 1, June 2010, pp55-64

  • The Disease to Please

    착한 아이로 키우지 마라 : 우리 아이를 불행하게 만드는 ‘착한 아이 콤플렉스’ 또는 나는 왜 눈치를 보는가와 같은 책이 있다면 서양에는 Harriet B. Braiker의 The Disease To Please: Curing the People-Pleasing Syndrome라는 책이 있음을 오늘 알게 되었다. 국내에는 “남 기쁘게 해주기라는 병“(이창식 옮김, 넥서스 간)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해리엇 브레이커의 책 ‘남 기쁘게 해주기라는 병(The Disease to Please)’도 남의 인정에 연연하는 것은 일종의 중독이라고 말한다. 마약 중독자가 마약을 찾듯 인정 중독자는 사람의 인정에 목말라 한다. 저자는 인정 중독의 네 가지 증상을 이야기했는데 내 증상과 똑같았다. 비판을 마음에 담아두는 성향, 주변 사람들에게 거부를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자신의 진짜 감정을 표현하는 데 서투름, 거절해야 할 때 거절하지 못하는 모습. 어떤가? 왠지 뜨끔하지 않은가? – 크레이그 그로쉘 지음, 정성묵 옮김, 일상의 거룩함을 회복하라, 두란노, p162
    남의 기대를 의식하는 소심함이 특별히 동양에만 있는 증상이 아니라 인류 보편적인 증상이라는 점에서 약간의 묘한 안도감이 느껴졌다. 읽어봐야 알겠지만 접근방식이 동서양이 서로 다르지 않을까 싶다.]]>

  • Breather.com, a micro-rental

    Breather.com이 무척 흥미롭다. 필요할 때에 잠깐 빌려쓰는 렌트카 서비스인 미국의 zipcar나 우리나라의 so-car와 유사한 개념인데 리사 갠스키의 저서 메시(The Mesh): 빌려주는 사업의 시대가 온다에서 이야기하는 공유경제(sharing economy)가 구현된 또 하나의 사례다. 한편, 개인 규모로 제공되는 숙박 서비스를 연결하는 서비스인 airbnb의 개념이 사무 공간으로 확장된다면, breather.com처럼 단일회사에서 운영, 관리되는 사무공간의 마이크로 임대가 아닌, 다수의 임대 공간 제공자를 연결해주는 서비스가 등장할 가능성도 있다. 다면, 범죄에 악용될 소지나 보안에 취약해지기 쉽다는 문제에 대한 우려를 극복하려면 당분간은 인지도가 높은 브랜드의 하위 브랜드로, 단일 주체에 의한 운영, 관리 방식이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이미 공간 임대업을 하고 있는 호텔 등의 숙박업소나, 회의 공간을 제공하기도 하는 까페나, 사무 공간에 여유가 있는 건물주 또는 독서실 등을 운영하는 임대업자가 이런 마이크로 임대 사업에 참여하기가 쉽겠다. 약간 다른 이야기지만 입주사가 많은 건물에서는 시간 단위로 사무기기 등을 빌려주는 마이크로 렌탈이 가능하리라 생각하는데 이미 구현된 사례가 있지 않을까?]]>

  • So God Made a Farmer

    2013년도 수퍼볼 광고 중 하나인데 크라이슬러 그룹 소속의 RAM Trucks에서 만든 “Farmer” 라는 제목의 광고. “농부의 자부심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스틸 사진 슬라이드쇼와 Paul Harvey라는 방송인의 1978년 연설 녹화 내용을 결합한 컨셉이다.

    https://youtu.be/AMpZ0TGjbWE

    링크: http://www.youtube.com/watch?v=AMpZ0TGjbWE

    농부들이나 농부를 부모로 둔 사람들이 이 광고를 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을 듯.

    Communication Arts 기사에 따르면 이 광고를 제작한 The Richards Group에서는 낭독 내용에 어울리는 사진을 찍어오도록 열 명의 사진 작가를 고용했다고 한다. 손쉽게 구글 검색으로 이미지를 따오거나 온라인 사진 사이트에서 기존의 사진을 골라오지 않고 일부러 사진 작가를 고용해서 새로운 사진을 찍도록 한 의사결정이 멋지다.

    이 광고에 동원된 사진 작가는 다음과 같다. William Albert Allard, Andy Anderson, Jim Arndt, Daniel Beltrá, Mark Gooch, Andy Mahr, Kurt Markus, David Spielman, Matthew Turley and Olaf Veltman

    이들이 찍어 온 사진은 10만장이 넘었는데 그 중 35 장을 엄선했다고. 2분 동안의 광고 시간 동안 회사 이름은 맨 마지막에 잠시 보일 뿐이지만 시청자의 마음에 남는 인상은 강렬하다.

    프리젠테이션을 제대로 하기 위해, 단 한 컷이라도 주제에 맞아떨어지는 사진 이미지를 얻기 위해 이 정도의 노력을 기울일 수 있다면.

    *참고: 이 광고를 번역한 분이 계시다.

  • Anchoring Effect

    행동경제학에서 종종 등장하는 용어인 앵커링 효과(anchoring effect). 닻내림 효과, 정박효과, 기준점 효과 등으로 옮겨지곤 하는데 어떤 기준점이 세워지느냐에 따라 뒤따르는 의사결정이 영향을 받는다는 이야기다.

    이 효과가 적용되는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1. 형제가 많거나 비슷한 나이또래의 사촌이 많을 경우 가장 먼저 대학입시를 치루는 아이가 어떤 결과를 내는지에 따라 다음 차례에 이어질 아이들이 느끼는 심리적 압박감이 달라질 수 있다.
    2. 아는 형, 누나들이 장학금을 받고 진학을 하면 의례히 그 정도는 해야하나보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3. 가까이 지내는 어른분이 비교적 이른 나이에 은퇴를 하면, 그 주변 사람들–주로 후배–도 은퇴를 고려하는 나이가 하향 조정된다.
    4. 올림픽에서 한번 4강 진출을 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예선탈락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진다.
    5. 가족 중에 새벽에 일어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나머지 사람들은 늦잠을 잔 것처럼 보인다.
    6. 모임에서 돌아가며 자기 소개를 할 경우 맨 처음 하는 사람이 어떤 식으로 자기 소개를 하느냐에 따라 이어지는 자기 소개의 내용과 수준이 결정된다.
    7. 고급 브랜드 신제품을 보고 나면 갑자기 다른 제품이 오징어로 보인다.
    8. 개강 후 수업 첫 시간에 교수가 늦게 들어오면 다음 시간부터 지각하는 학생이 급격히 증가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앵커링 효과는 경험 디자인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만약 모임을 기획한다면 여러 활동 중에서 첫 테이프를 끊는 역할은 미리 준비된 사람을 배정해서 모임이 바람직한(또는 의도된) 방향으로 가도록 상황을 유도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 나는 왜 책을 읽는가?

    우리나라 직장인의 평균독서량은 연간 15권 정도(2012년 기준)라고 하는데 내 경우는 세어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단행본 기준으로 한 해에 적어도 50권 정도는 읽는 것 같고, 아무리 많아도 100 권은 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평균보다는 많이 읽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아주 많이 읽는 축에는 끼지 못한다.

    극단적으로 많은 양의 책을 읽는 아웃라이어(outlier)가 간혹 있다. 한 해 동안 1000 권의 책을 읽는 독서와 바인더로 인생을 설계하라의 저자 유성환 씨나(2010년 기준), 연간 5000 권 정도를 읽는 일본의 IT 개발자 겸 서평가 고가이 단(Kogai Dan) 씨와 같은 경우다.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의 저자 다치바나 다카시는 지난 10년을 평균해 보았을 때 하루에 한 권 정도 책을 읽은 셈이 된다고 한다.

    이들은 자신이 책을 너무 많이 읽은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점이 흥미롭다. “책을 많이 읽어봤는데 아무 소용 없더군요. 차라리 그 시간에 운동을 하거나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더라면 훨씬 더 보람있는 인생이었을텐데…”하는 이야기가 (적어도 아직까지는)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지나친 독서의 부작용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일까?

    저마다 책을 읽는 이유가 다르겠지만 내가 책을 읽는 이유를 굳이 대라고 한다면 몇 가지 유형별로 분류가 가능할 것 같다.

    1. 답을 찾고 싶어서 읽는 책 – 주로 실용서에 해당한다. 공학적 문제를 풀려고 오랜 시간을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나중에서야 교과서나 논문 등에 그 해결책이 버젓이 소개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허탈함을 느낀 적이 여러 번 있었다. 파랑새를 찾아 사방팔방 떠돌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파랑새는 원래부터 집 안에 있었음을 발견하는 경우인 셈인데 이런 경험 때문에 어쨌든 열심히 책을 읽어야 헛고생을 덜 한다는 약간의 강박감이 생겼다. 또한 IT와 연관된 문제 해결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이 이미 만들어놓은 해법을 일종의 템플릿으로 삼으면 훨씬 손쉽고 빠르게 일을 해결할 수 있다. 이런 유형이 나의 독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고 본다.
    2. 사고의 패턴에 익숙해 지기 위해 읽는 책 – C.S. Lewis, 피터 드러커와 같이 남달리 명료한 생각을 하는 이들이나 Richard Buckminster Fuller와 같이 실용적 상상력이 뛰어난 사람을 닮고 싶은데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어림도 없으니 그런 저자들의 책을 자꾸 읽어서 그들의 생각의 흐름을 뒤따라가다 보면 언젠가는 나도 그런 방면으로의 발달이 이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 읽는 책들이 이에 해당된다. 또한 생소한 전문 분야의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 경우 해당 분야의 책을 불과 몇 권이라도 읽어놓으면 상대방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고 의사소통을 진행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일부러 읽는 경우도 있다.
    3. 읽어야 하기 때문에 읽는 책 – 매월 한 권씩, 선정된 책을 읽어가야 하는 어느 독서 모임 때문에라도 연간 12권의 책을 읽게 된다. 내가 직접 고를 가능성이 희박한 책이 선정도서로 정해질 때마다 익숙해져버린 평소의 독서와 관심의 영역을 넘어설 수 있어서 좋다.
    4. 지식의 빚을 갚고 싶어서 읽는 책 – 비교적 오랜 시간을 학생 신분으로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일찍 정신을 차리지 못하여 소중한 배움의 기회를 철저하게 활용하지 못한 죄책감이 항상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다. 내가 전공한 분야에 대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함에도 실제로는 잘 모르고 있는 내용이 너무나 많아서 언젠가는 이 지식의 공백을 채워넣어야 한다는 채무의식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주로 전공 관련 서적인데 실제로는 많이 읽지 못하고 있다.
    5. 재미있을 것 같아서 읽는 책 – 주로 유머 수필, 픽션, 만화 등이 이에 해당한다. 나의 독서의 5% 정도를 차지한다.
    6. 사람을 만나는 것에 대한 대안으로 읽는 책 – 사실 나는 사람을 일대일로 만나 질문을 주고 받는 경험을 매우 좋아한다. 하지만 내가 수줍음이 너무 많거나 상대를 지나치게 배려해서 그런 기회를 적극적으로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서인지 그런 기회는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꼭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 인물은 너무 바쁘거나 신분이 높아 범접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 책을 통해 대리만족을 얻기도 한다. 명망있는 인물이 펴낸 자서전이나 수필집을 읽으면서 그 사람과 직접 만나지 못한 안타까움을 해소하면서 위로를 얻는 셈이다. 물론 밥값도 절약할 수 있다.

    한편, 40대 후반 들어 독서량은 늘어났지만 기억력은 현저히 약해져서 책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20-30대에 그냥 흘려보낸 시간이 얼마나 많은지 한탄스럽다. 역시 공부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철저하게 해야 함을 절감한다.

  • 우지 도모코, 디자인력

    일본 우지 퍼블리시티사의 아트디렉터 우지 도모코가 쓴 디자인력(원제: デザインセンスを身につける). 특별히 와닿은 메시지는 온라인 SNS 등에 사용되는 프로필 사진에 신경을 써야한다는 것.

    이제는 인터넷에서도 현실만큼 첫인상이 중요해졌다. […] 그렇지만 그 가운데에는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생각하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디자인 문맹이거나 디자인 센스가 없는 상태라고밖에는 볼 수 없다.
    이를 기업 활동으로 보면 로고나 제품 포장지를 대충 디자인해놓고, 또는 자사의 디자인이 취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대로 두는 것과 같다.

    – 우지 도모코 지음, 정선우 옮김, 디자인력, 안그라픽스, p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