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thoughts

  • 도서 구매 이력

    사물 지능 혁명“이란 책을 공저로 출간한 소식을 공병호님의 글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친구가 쓴 책이고 좋은 평도 얻고 있으니 한번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한편, 위의 책과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토마스 프리드먼의 책 “늦어서 고마워(Thank You for Being Late)”라는 책도 평이 좋은 듯 해서 읽어볼까 했더니 3만원이 넘는 가격인데다가 600 페이지가 넘는 책이어서 무겁게 들고 다니기 곤란할 듯 하여 이번에는 낭독 시간 19시간 이상인 오디오북으로 들어보기로 했습니다. 다른 한편, 토마스 프리드먼은 자신의 책에서 “하우(How)“라는 책의 저자이자 자신의 친구인 더브 사이드먼(Dov Seidman)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침 중고로 저렴하게 판매되고 있어서 이 책 “하우(How)”도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말, 친척 중 한 분이 김석희 지음, “번역가의 서재“를 추천하셨는데 이 책도 중고로 저렴하게 판매되고 있어서 주문했습니다. 이렇게 충동적으로 책을 구입하다보니 읽는 속도가 따라가지를 못해 서론조차 읽어보지도 못하고 쌓여있는 책이 상당하여 항상 세상에 대해 송구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

  • 히로나카 헤이스케, 학문의 즐거움

    김동연 지음, 『있는 자리 흩트리기』 (쌤앤파커스 2017)에서 저자는 일본의 수학자 히로나카 헤이스케(広中 平祐)의 『학문의 즐거움』이라는 책을 언급합니다. 저자가 2012년에 중앙선데이에 기고한 “수학이 아름답다고?“라는 글에서도 같은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궁금해져서 결국 『학문의 즐거움』이란 책을 손에 넣었습니다. 책 앞머리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사람은 왜 배우는가?
    인간의 두뇌는 과거에 일어난 일이나 얻은
    지식을 어느 정도는 잊어버리게끔 되어 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인간의 두뇌는 과거에 습득한 것의 극히
    일부밖에 기억해 내지 못한다.
    그런데 왜 사람은 고생해서 배우고,
    지식을 얻으려 하는가?
    이제부터 그 이유를 밝히겠다.

    히로나카 헤이스케 지음, 방승양 옮김, 『학문의 즐거움』 (김영사 1992) p5

    저는 독서를 무척 좋아하지만 읽은 책의 내용이 거의 기억나지 않아서 이럴 거면 독서는 왜 하는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던 터라 이 말이 아주 강렬하게 와닿았습니다. 이 책에서는 그 이유를 어떻게 밝히고 있는지 매우 궁금해집니다.

  • about the big picture we do not see

    Professor John Doggett on his facebook: [su_quote] A visiting Pastor was attending a men’s breakfast in a Mississippi Farm County. He asked one of the impressive older farmers in attendance to say grace that morning. After all were seated, the older farmer began—— “Lord, I hate buttermilk. The Pastor opened one eye and wondered to himself where this was going. Then the farmer loudly proclaimed, “Lord, I hate lard.” Now the Pastor was worried. However, without missing a beat, the farmer prayed on, “And Lord, you know I don’t care much for raw white flour.” Just as the Pastor was ready to stand and stop everything, the farmer continued, “But Lord, when you mix ’em all together and bake ’em up, I do love fresh biscuits. So, Lord, when things come up we don’t like, when life gets hard, when we just don’t understand what you are sayin’ to us, we just need to relax and wait ’till You are done mixin’, and probably it will be somethin’ even better than biscuits. Amen.” [/su_quote]]]>

  • [quote] Lewis Hyde, The Gift

    The Gift, Cannongate, 2012, pp140-141[/su_quote] ]]>

  • recommended: Smarter Every Day

    An article posted on dpreview.com introduced me to this super-interesting video series called “Smarter Every Day“, created by Destin Sandlin. https://youtu.be/IANBoybVApQ I just love what this guy is doing. Recommended. ]]>

  • 환상은 아름다워 보이기 마련이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문학사상 2009, p103[/su_quote] [su_quote]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유토피아를 찾아봐야 의미가 없다고.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있다면 머릿속에 있을 뿐이다. 머릿속에 있기 때문에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다. 이곳이 아닌 다른 어느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없으면 다른 데에도 없다. 여기저기 들락거리며 웃물만 맛보고 세상이 넓어졌다거나 깊어졌다거나 혹은 실망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얕은 바다에 떠서 돌아다니기만 하는 행위와 같다. 늘 자기 마음에 드는 경치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일종의 자기 찾기다. 그래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바다에는 심해어가 있는 세계도 있다. 그것을 알려면 하나의 바다 속으로 깊이 더 깊이 잠수해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세상은 깊이가 있어 재미있는 법이다. — 가노코 히로후미 지음, 이정환 옮김, “정신은 좀 없습니다만 품위까지 잃은 건 아니랍니다“(푸른숲 2017), pp235-236[/su_quote]]]>

  •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사람마다 타고난 성격이 있고, 자신의 성격의 스펙트럼에 더 잘 어울리는 사회적 역할과 직업이 존재한다. 물론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상황이나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맞지 않는 성격을 억지로 맞춰가면서 자신의 역할을 해내는 경우도 있다. 주어진 상황에 자신을 맞추는 것과 자신에게 맞는 상황을 선택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반드시 “옳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작가 우치다 타츠루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열렬한 팬이라고 하니 참고삼아서라도 읽어보려고 그의 수필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다. 그의 성격과 관련된 글을 읽으면서 달리기와 글쓰기가 그의 성격과 잘 어울린다고 느꼈다. 성격에 맞지 않는다면 굳이 팀으로 일하는 직업을 택하거나 상대를 쓰러뜨려야만 이길 수 있는 유형의 스포츠 또는 경쟁적 비즈니스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su_quote]나는 팀 경기에 적합한 인간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경기에는 잘 맞지 않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좋든 싫든 그것은 타고난 나의 성격인 것이다. (중략) 물론 나라고 해서 지는 걸 좋아할 리는 없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다른 사람을 상대로 이기거나 지거나 하는 경기에 대해서는 옛날부터 한결같이 그다지 연연하지 않았다. 그러한 성향은 어른이 된 뒤에도 대체로 변하지 않는다. 어떤 일이 됐든 다른 사람을 상대로 이기든 지든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보다는 나 자신이 설정한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는가 없는가에 더 관심이 쏠린다. 그런 의미에서 장거리를 달리는 것은 나의 성격에 아주 잘 맞는 스포츠였다. —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문학사상 2009, pp24-25[/su_quote]]]>

  • 사이토 마사토, 좋은 치과의사를 만나는 10가지 똑똑한 방법

    치과 의사들의 안타까운 속사정을 고발하는 책. 사이토 마사토 지음, 조은아 옮김, “좋은 치과의사를 만나는 10가지 똑똑한 방법“(와이즈베리 2016). 원제는 “この歯医者がヤバい(이 치과 의사는 위험해)”인데 우리말 제목을 교묘하게 잘 뽑았습니다. 치열해진 경쟁 환경에서 치과 의사들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과잉 진료를 하는 경향이 많으니 조심하라는 내용입니다. 특히 임플란트의 위험성을 강조합니다.

    일본의 이야기이겠지만, 저자는 악질 치과의사가 “일부 소수”가 아니라 대다수(80%)를 점하고 바른 진료를 하는 치과의사는 20% 정도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대목이 놀라웠습니다. 경쟁이나 돈벌이를 위해 가치보다 편의를 우선하는 일(choosing expediency over principle)은 치과의사에 국한되는 일은 아니겠지만, 당장 아내가 잇몸 치료를 위해 믿을만한 치과를 찾아야 하는 현실에서 이런 책을 읽으니 난감합니다.

    책에서 인상 깊었던 내용을 아래에 적습니다.

    자존심을 버리지 않는 치과의사는 도태된다.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달콤한 시절은 끝났기 때문에 의식을 바꾸지 않는 사람은 살아남을 수 없다. 한 달에 한 번은 공연을 보고 외식을 하는 허영 가득한 삶에 종지부를 찍고 이상한 엘리트 의식을 버린 후, ‘평범한 중산층’임을 자각해야 한다.
    꿈과 같은 치과의사 성공시대는 지나갔다. 이젠 ‘나는 별 볼 일 없는 치아 기술자’라고 자각하는 사람만이 살아남는다. 허영 덩어리로 사치스럽게 생활하는 치과의사일수록 돈을 모으려고 환자의 입속을 여기저기 건드려댄다. 우선 환자의 입속을 괜히 건드리는 일을 그만두고, 자신의 생활에도 환자의 입에도 욕심을 부리지 말자.

    — 사이토 마사토 지음, 조은아 옮김, “좋은 치과의사를 만나는 10가지 똑똑한 방법“(와이즈베리 2016), p55

    참고: 저자 사이토 마사토(斎藤 正人)의 블로그: 이를 뽑지 않는 치과의사의 혼잣말(抜かない歯医者のひとりごと)

  • 가노코 히로후미, 정신은 좀 없습니다만 품위까지 잃은 건 아니랍니다

    가노코 히로후미 지음, 이정환 옮김, “정신은 좀 없습니다만 품위까지 잃은 건 아니랍니다“(푸른숲 2017). 일본 후쿠오카에 위치한 작은 요양단체 “요리아이 노인홈(宅老所よりあい)“의 설립 과정을 재미있게 적어낸 책입니다. 원제는 “헤로헤로(へろへろ; 비틀비틀)”인데 번역서 제목을 요령있게 잘 뽑았습니다.

    치매 노인을 돌보는 힘들고 어려운 일을 “재미있게” 접근한 등장인물들의 호탕한 태도가 무척 인상적입니다. 난감한 일을 당해도 키득거리며 신난다는 태도로 받아들이는 그들의 모습은 “사랑으로 변한다“의 저자 밥 고프를 연상시킵니다. 맡긴다는 의미의 “의탁”의 개념보다 “자연스럽게 뒤섞인다”는 지역 공동체 개념로서의 요양이라는 것에 대한 남다른 통찰을 얻을 수 있어서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커뮤니티 디자인이라는 관점에서도 좋은 연구 자료가 됩니다.

    이 책의 키워드는 “시설과 사회의 자연스러운 연결”이 아닐까 싶습니다. 요양홈이 지역 사회와 뚜렷한 경계선을 그어놓은 격리시설이 아니라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느슨하게 이어지는 구조를 갖게끔 디자인한 것이 “요리아이 노인홈”의 특징인 듯 합니다. 물론 이런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직원들은 자연스럽지만은 않은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말입니다. 인상 깊은 구절을 아래에 인용합니다.

    사람은 요양시설에 들어간 순간, 마치 사회에서 모습이 사라지듯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요양시설이라는 말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느껴지는 이유는 사회에서 내몰린 사람들이 유폐된 곳이라는 이미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에는 그런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해서인지, 지역 교류 공간을 갖춘 요양시설도 늘어났지만 출입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놀러 가고 싶은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도 그렇다. 또한 ‘교류’라는 말을 요양시설 쪽에서 꺼내면 사람들은 왠지 모르게 무거운 짐을 져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낀다. 무엇인가 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교류 따위는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뒤섞이는 분위기가 나면 그걸로 충분하다. 바다로 흘러가는 강물이 바닷물도 민물도 아닌 애매한 상태가 되듯, 또 썰물과 밀물에 의해 바닷물도 되고 민물도 되듯, 두 세계가 자연스럽게 뒤섞이면 그걸로 충분하다.

    — 가노코 히로후미 지음, 이정환 옮김, “정신은 좀 없습니다만 품위까지 잃은 건 아니랍니다“(푸른숲 2017),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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