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thoughts

  • 서비스 디자인의 타산지석

    WeWork와 비슷한 점이 많았는데 비슷한 점은 거기까지였습니다. 왠지 처량해 보이는 편의시설(amenities)을 둘러보면서 가장 놀라웠던 점은 전자레인지를 대략 160-170cm 정도 높이에 둔 것이었습니다. 전자레인지 문을 열었을 때 회전판을 눈으로 확인할 수 없을 정도의 높이는 상당히 위험해 보였습니다. 안내하시는 분께 이 점을 언급하자 설계상 다른 곳에 놓을 자리가 따로 없어서 어쩔 수가 없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지금은 과도기여서 임시로 이렇게 한 것이고 나중에 바꾸려고 한다고 했으면 모를까, 그냥 이렇게 쓰는 것이라는 답변을 들으니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II. 중요한 비즈니스 미팅을 위해 꽤 이름 있는 회사를 방문하여 대형 회의실에 들어섰는데 흉한 모습으로 말라 죽어가는 화분이 테이블 위에 놓여있었습니다. 이전에 방문했을 때부터 시들시들했던 기억으로 미뤄볼 때 아무도 돌보지 않고 있음이 분명했습니다. 사진으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꽤 볼썽사나운 광경이었습니다. 저를 회의실로 안내한 리셉션 직원에게 이 사실을 언급하자 어쩌라고 하는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당황해서 그랬을 거라고 좋게 해석하고 싶지만 그걸 왜 자기에게 말하느냐 하는 느낌이 더 강했습니다. 참고로 이 회사와의 관계에서 제가 고객 입장입니다. 결국 다른 직원이 와서 “이걸 치워달라는 말씀이신가요?”라고 굳이 저에게 물어본 후 가져갔습니다. III. 모 대기업 계열의 보험회사 고객 창구를 방문했는데 탁자 바로 위에 사진에서 보는 안내문이 버젓이 붙어 있었습니다. 서비스 품질 확인을 위한 설문 전화가 걸려올 때 최고 점수를 달라는 요청입니다. 일종의 심리적 닻내림(anchoring) 효과를 기대하는 것일까요? 서비스 현장에서 이런 메시지를 흔히 마주하지만 이런 상황이 몇 년 째 계속되고 있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마치 경영진을 포함해 조직 전체가 이런 낯부끄러운 아이러니에 동의한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만약 식당에서 “누가 어땠냐고 물어보면 무조건 맛있었다고 말해주세요”라고 손님들에게 부탁한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 – – 위의 사례 모두, 서비스 전체에 비하면 매우 작은 부분에 해당합니다. 관리자와 현장 직원 각자 자기 업무에 바쁘다 보면 고객 입장에서 보이는 사소한 것들은 간과하기가 쉽습니다. 아마도 고객이 알 수도 없는 더 큰 내부 문제로 저마다 골머리를 앓느라 이런 작은 요소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빈틈없는, 높은 수준의 서비스는 쉽게 흉내낼 수 있는 게 아닌가 봅니다. 한편, 제가 제공하는 서비스에 대해서는 다른 분들이 과연 어느 정도나 만족하는지 너무나 궁금합니다. 모두 점잖은 분들이어서 좋게 표현하시니 행간을 읽어낼 만큼의 센스가 부족한 저로서는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기가 어렵습니다. “매우 만족”보다 솔직한 피드백이 저는 더 좋습니다. #호의적인돌직구환영]]>

  • Dad's choices

    Dad bought this piano in 1979 when I was 12 years old. Now my 10-year old daughter is playing this 38-yr old piano. It still sounds good with tuning once in a while. When buying things, Dad always tried to choose products of high quality that would last long. I was not like Dad. I was more inclined to buying what is most affordable. Perhaps that is why my favorite retail store is Daiso, a successful dollar shop chainstore that is quite popular in Japan in Korea. I don’t think I could have bought this Yamaha piano back then. Not even now. Dad had a good taste.]]>

  • Refresh My Heart

    [su_quote]I do wish, brother, that I may have some benefit from you in the Lord; refresh my heart in Christ. — Philemon 1:20 (NIV) [/su_quote]]]>

  • the virtue of silence

    My father, Young Hyun Jung, passed away on September 4th, 2017, finishing his long journey of 83 years through this world. His soul, I believe, has left his long-worn body to join his ancestors. I also believe I will meet him again in the Kingdom of Heaven. The funeral was held on September 8, 2017. His body was cremated and his ashes were placed at the family burial site in Gumi, a city in southern part of Korea, near where he was born. Many people remember Dad as a quiet person. He usually did not speak much, sometimes embarrassingly so, especially when we had guests at home. He loved buying books and he read a lot. He was often seen scribbling notes page after page. So I think he had lots of ideas although he rarely spoke in length about what he had in mind. [su_quote]”For language to have meaning, there must be intervals of silence somewhere, to divide word from word and utterance from utterance. He who retires into silence does not necessarily hate language. Perhaps it is love and respect for language which imposes silence upon him. For the mercy of God is not heard in words unless it is heard, both before and after the words are spoken, in silence.” — Thomas Merton [/su_quote] While reading about Thomas Merton and his remarks on silence, I was reminded of Dad and I came to think that keeping one’s mouth shut unless critically necessary while giving focused attention to what others have to say is a virtue. ]]>

  • You are a soul; you have a body.

    mereorthodoxy.com [/su_quote] ]]>

  • 아툴 가완디, 어떻게 죽을 것인가

    제가 좋아하는 의사 겸 저술가 아툴 가완디(Atul Gawande)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Being Mortal)”을 예전에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이 책에서 말하길 의사들은 병을 고치는 훈련을 전문적으로 받는 반면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지 돕는 훈련은 일반적으로 안 되어 있어서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환자와 그 보호자를 대하는 것이 서툴다고 하더군요. 겪어보니 그런 면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해결이 요구되는 의학적 문제를 상대하는 것과 그 문제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상대하는 것은 서로 다른 듯 합니다. 전자는 의사, 후자는 간호사에게 각각 맡겨진 전문 영역인 것 같기도 합니다. 어찌되었건 직업으로서의 온갖 혹독한 어려움을 견디면서 사명감으로 일하는 의료전문인들에게 감사한 마음입니다. ]]>

  • 손님을 모으는 힘 – 집객력

    일본의 사상가 우치다 타츠루는 자신의 집을 “개풍관(凱風館)”이라는 이름의 합기도 도장으로 만들어 무도를 가르치고 동시에 일본 고전 연극 발표장으로 사용한다. 그래서 항상 제자들로 북적거린다.

    신약성경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은 바울이 생애 말년에 피의자 신분으로 로마에 이송되어 재판을 기다리는 2년 동안 셋집에 머물렀는데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영접하고 가르치는 일상을 보냈다고 기록한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사도행전‬ ‭28:30-31‬ ‭KRV‬‬

    이런 배경에서, 나는 노후에 손님들이 빈번하게 찾아올 수 있는 공간을 유지하고, 그들을 가르칠 수 있는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삶이 이상적인 노년의 모습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려면 한적한 시골보다는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대도시가 좋지 않으려나.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태복음‬ ‭7:12‬ ‭KRV‬‬

    노년에 남이 나를 찾아와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만큼 나도 지금 연세드신 어른들을 찾아가야겠다.

  • Transitions and Accountability

    Put your house in order, because you are going to die; you will not recover.” — Isaiah 38:1 NIV[/su_quote] [su_quote]Jesus told his disciples: “There was a rich man whose manager was accused of wasting his possessions. So he called him in and asked him, ‘What is this I hear about you? Give an account of your management, because you cannot be manager any longer.‘ — Luke 16:1-2 NIV[/su_quote] Perhaps I should always try to clean up after myself properly before I leave. ]]>

  • 우치다 타츠루의 트위터 포스팅 중에서

    우치다 타츠루의 2017년 8월 22일자 트윗 내용이 흥미로워서 살짝 옮겨 봅니다.

    오늘자 마이니치(毎日)신문에 의하면 과거 40년간 18살 이하 자살자 18,000명 중 131명이 9월 1일에 자살하고, 이 날짜를 전후한 9일 동안(*) 700명이 자살했다고 합니다. 새학기가 시작되면서 학교 가는 것이 정말 싫었나봅니다. “학교는 목숨을 걸면서까지 가야만 하는 곳은 아니다”라는 논설위원의 말에 저도 찬성합니다.

    18살까지는 “학교 비스무리한 곳”에 간혹 연이 닿는 정도로 충분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출석을 안 해도 중학교는 졸업은 시켜주고, 고등학교의 경우 방송통신 고등학교나 단위제 고등학교, 그리고 고교 졸업학력 검정고시도 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시절 따돌림 때문에 등교를 거부했고,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로 대학에 갔습니다.

    학교에 가려고 할 때 신체가 싫어하는 느낌을 저는 잘 압니다. 그런 경우 신체가 보내는 목소리를 듣는 편이 좋습니다. 두뇌는 할 수 없는 일을 강요하거나 무의미한 일을 견디라고 요구하곤 하지만 신체는 생물로서 있는 그대로 기분 좋게 살아가기를 요구합니다. 신체의 목소리를 따르는 편이 낫습니다.

    — 우치다 타츠루, 2017년 8월 22일자 트위터 포스팅

    우치다 타츠루가 언급한 마이니치신문의 기사에서는 청소년 자살의 문제점을 거론하면서 학교 생활에서 따돌림 등을 비롯해 이런저런 고민거리를 안고 있는 아이들은 개학을 앞두고 마음이 괴로울 수 있다는 현실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개학을 앞두고 한숨쉬며 힘들어하는 모습이 보인다면 “쉬고 싶은만큼 쉬려무나”라고 말해주는 것이 좋다는 관련 지원단체의 이야기를 인용합니다.

    두뇌(이성)의 요구와 신체(본능)의 요구 중 신체를 따르는 것이 반드시 낫다고는 할 수 없겠습니다만, 어린 나이에 학교에서의 따돌림 때문에 삶을 포기할 정도로 괴로워하기 보다는 차라리 학교에 가지 않는 편이 낫다는 이야기입니다

    *우치다 타츠루는 9월 1일을 전후한 “5일 동안”이라고 썼지만 마이니치신문 기사 원문에 의하면 “9월 1일을 전후한 9일 동안”이라고 했으므로 원문을 기준으로 고쳐 적었음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