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첩의 가격, 기록의 가치

daiso_note_A7

IKEA가 지향하는 사상이라고 한다면 ‘우리 디자인은 좀 괜찮으니까 일단 비싸게 받을께’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을 것 같은 문구 회사를 꼽으라면 이태리 밀라노에 본사가 있는 Moleskine(*)과 일본의 Midori라는 두 문구회사가 떠오른다.

자기들이 만드는 수첩의 종이 질이 다르다는 점을 엄청 강조하는 두 회사 모두 품질이 떨어지는 저렴한 대체 상품에 비해 많게는 10배의 가격으로 판매한다는 느낌이다.

Moleskine으로 대표되는 고급 수첩 시장에서 형성된 높은 제품 가격대에도 비즈니스가 된다는 것은 구매자들이 그만큼의 가치를 인정해 주고 있다는 뜻도 되는데, 비싸게 주고 구입한 만큼 더 정성스럽게 간직하고 더 의미있는 내용을 적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또 어떻게 보면 Moleskine이 price leader로서 고집스럽게 고수하는 높은 가격 정책 덕분에 문구라는 생태계에 존재하는 유사 수첩 제품들이 생존의 실마리를 얻고 있는 것인지도.

한편, Moleskine이나 미도리 노트가 주는 독특한 질감이나 고급스런 이미지 등을 포기한다면 저렴한 대안은 얼마든지 있다. 저렴한 대안의 예로 다이소에서 판매하는 정가 1,000원의 하드커버에 고무줄 달린 밴드고정식 미니 수첩을 구입해 보았다. (아래 사진) 겉모습은 그동안 애용했던 정가 10,000원의 Leuchtturm 수첩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일단 고급스런 필기감을 자랑하는 Santina 미도리 노트(시중가 14,800원)에 비해 종이가 거칠어 만년필로 글을 쓰면 서걱서걱하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나는 서걱서걱하는 느낌이 좋아서 일부러 Lamy Safari 만년필을 사용하는 관계로 이 점이 단점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또한–나 스스로도 의외라고 생각되어 놀랐는데–종이의 질이 그다지 높아보이지 않는데도 만년필 잉크가 번지거나 뒷면에 많이 비쳐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종이가 상대적으로 두꺼워서 그런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한편, 수첩의 펼쳐질 때의 뻑뻑함이나 겉표지의 질감의 차이, 그리고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은 접착제 냄새 등에서 염가 제품의 단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수첩의 가격이 어떠하든 그 안에 무엇을 기록하느냐가 훨씬 중요하다. 500원짜리 일수 공책이든 20,000원 내외의 Moleskine 수첩이든 사용자가 가치있는 기록을 남길 수만 있다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다만 사용자가 심리적인 애착을 가지고 더 정성스럽게 사용하도록 만드는 묘한 매력이 제품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다면 각자 자신에게 맞는 제품을 사용하면 된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Moleskine의 공식 발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Moleskine 브랜드를 특정 국가와 연결시키지 않으려는 전략의 일환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일단 “몰스킨”으로 통하는 반면 이태리에서는 “몰레스키네”라고 부른다고.

Comments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