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매, 부등교, 학습붕괴, 소년범죄가 아이들 위기의 중심이 아니라면, 위기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매스컴들이 떠들고 있는 많은 ‘위기’가 만들어진 ‘위기’이며, 학령아동 1% 정도의 위기인 것에 비해 적어도 70-80%의 아이들을 엄습하고 있는 심각한 위기가 있다. 바로 ‘배움’으로부터의 도주이다.”
— 사토 마나부 지음, 손우정, 김미란 옮김, “배움으로부터 도주하는 아이들“, 북코리아,2003, p19
우치다 타츠루의 몇 저서에서 사토 마나부 교수를 인용한 것을 보고 읽기 시작한 책. 도쿄대학에서 교육학을 연구하는 사토 마나부(佐藤学, 1951년생) 교수가 2000, 2001년에 각각 발표한 두 권을 합본으로 엮은 책이다. 일본의 청소년들의 실태를 학생 개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전체 교육 시스템의 붕괴의 관점에서 바라본 내용으로서,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을 바라보는 유용한 관점을 제시한다. 저자는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교육은 노력과 경쟁을 통해 개인의 사회적 신분의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틀을 제공했다고 풀이한다. 그리고 이런 틀을 동아시아 국가들이 공통적으로 받아들였다고 본다.
1980년대 이후, 일본 학생들이 공부도 하기 싫고 일도 하기 싫어하는 경향을 현저하게 나타내기 시작한 현상에 대해 저자는 산업화에 의한 고성장 시대가 끝나고 저성장 시대에 들어서면서 자녀들이 공부를 통해 부모보다 더 나은 사회적 신분을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이 현저히 줄어든 것이 학생들의 의욕상실과 무기력의 이유 중 하나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압축된 근대화가 종언을 맞이하자 그 파탄이 한꺼번에 드러났다. 이제 대다수의 아이들은 학교교육을 통해 부모보다 높은 교육력을 획득할 수도, 부모보다 높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할 수도 없다. 학교는 일부의 ‘성공팀’과 다수의 ‘실패팀’을 가르는 장소로 변모했다. 학교는 많은 아이들에게 실패와 좌절을 체험하는 장소가 되어버렸다.”
— 같은 책, pp45-46
저자는 교육의 위기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공부’와 ‘배움’을 구분하면서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공부’에서 ‘배움’으로의 전환이라고 말한다.
“저자 자신은 공부와 배움의 차이를 ‘만남과 대화’의 유무에 있다고 생각한다. ‘공부’가 무엇과도 만나지 않고 아무런 대화도 없이 수행되는 것에 비해, ‘배움’은 사물이나 사람이나 사항과 만나고 대화하는 행위이며, 타자의 사고나 감정과 만나고 대화하는 행위이고, 자기자신과 만나고 대화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 같은 책, p65
저자의 말대로 산업성장기가 막을 내리고 사회가 저성장기에 들어서면서 교육을 통한 사회적 신분 이동의 가능성이 낮아졌다면, 교육의 필요성과 효용을 무엇에서 찾아야 할까? 배움 자체가 추구할만한 보편적 가치로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아니면 최소한 사회적 신분의 “유지”를 위한 필요조건으로서 공부를 안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마지막으로, 인상적인 구절.
“학력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알고 있는(할 수 있는) 수준으로 돌아가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모르는(할 수 없는)수준의 내용을 교사나 친구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모방하고 이를 스스로 내화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같은 책,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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