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치다 타츠루의 책 “스승은 있다”(박동섭 옮김, 민들레)는 약간은 수수께끼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데 저자는 그런 대화의 미확정성이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을 이룬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상대방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다 알아버린다면 커뮤니케이션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오히려 상대의 말에 대해 알쏭달쏭하게 생각할 수 있는 여지, 또는 주관적 해석의 여지가 남아 있는 대화가 좋은 대화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런 식으로 적어놓고 독자가 잘 이해하지 못했다면 그걸로 됐다라는 식으로 책을 마무리 짓는다.
“뭐라고요? 여기까지 읽었는데 우치다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모르겠다고요? ” 당신, 이런 책을 써서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 겁니까?” 음…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만 노선생은 실례하겠습니다. 부디 용서를!”
— 우치다 타츠루 지음, 박동섭 옮김, “스승은 있다“, 민들레, p150
선생이 던져주는 지식 그대로를 외우는 것으로는 배움이 성립하지 않고, 학생 스스로 의문을 품고 선생이 하는 말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해서 이해할 때 비로소 배움이 성립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다. 다만 모든 일에 대해 ‘무엇이든 본인이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흘러가버리면 곤란한 점도 있다. 과학은 각 개인의 주관적 이해를 넘어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사실이 존재함을 전제로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런 취지에서 “깨달음”–사물의 이치에 대한 주관적 이해와 해석–이 배움의 끝은 아닐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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