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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nea pig

공학, 디자인, 철학의 접점에 살았던 미국의 전설적 인물 Richard Buckminster Fuller는 자신의 생애가 20세기 문명 속에 살았던 한 인간의 사례로서 연구 대상이 되기를 바랬다. 그래서 자신을 가리켜 “guinea pig”이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했는데 우리말로 옮기자면 “실험용 쥐” 정도가 되겠다. 그는 자신의 행동과 생각, 그리고 일상의 흔적 등을 모아 꼼꼼하게 기록하고 보관해 두었다. 누군가를 위한 시료(specimen)로서 자신을 남긴 것이다.

그에 관한 이야기를 보고 나름 멋진 생각이라는 느낌이 들어 어느 정도 따라하고 싶은 생각이 항상 있었다. 웹 블로그를 시작하게 된 경위에 그의 영향이 있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인간이 혼자 살 수 없기에 자신에 관한 세밀한 기록에는 불가피하게 남의 이야기가 등장할 수 밖에 없는데 자신의 사생활이 드러나는 것을 모든 사람이 반기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문제다. 나의 블로그에 가족이나 친구들, 직장 동료들의 이야기나 인물 사진 등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컴퓨터 인터페이스 디자인의 전설적 인물 Jef Raskin의 아들 Aza Raskin은 자신의 글 “The Mac Inventor’s Gift Before Dying: An Immortal Design Lesson for His Son“에서 췌장암에 걸린 자신의 아버지와 보낸 마지막 시간의 일부를 기록해 놓았다. 아버지 Jef 자신이 스스로의 마지막 순간들을 기록할 여유도 힘도 없었을지 모르지만 그의 아들이 그 역할을 일부 대신해 주었다. 그저 일어난 사실을 객관적으로 열거한 것이 아니라 가족사에 얽힌 설명과 아버지와 주고받은 대화와 경험에 고유한 의미를 부여를 해서 훨씬 더 풍성한 기록이 되었고 읽는 독자로서도 이런 기록이 무척 고맙게 느껴졌다.

“I stare at the package in my hands. In it is my father. The man who invented the Macintosh and misnamed what should be “typefaces” as the “fonts” menu. He never forgave himself for his incorrect usage of English. He groomed me to use language exactingly and considered that mistake a failure of being young and reckless with semantics. The man who invented click-and-drag was now the man who could hardly keep his gaze focused on his son.”

– Aza Raskin, The Mac Inventor’s Gift Before Dying: An Immortal Design Lesson for His Son

수많은 사람들의 임종을 목도한 한 의료서비스 관계자에 의하면 영화나 TV드라마에서 종종 나오는 것처럼 죽음을 앞둔 침상에서 가족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나서 마치 촛불이 꺼지듯 숨을 거두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시름시름 앓다가 꽤 긴 기간에 걸쳐 정신이 몽롱해지고 한 동안 의식이 없는 채로 누워있다가 어느 순간 바이탈 싸인(vital sign)이 끊어진다는 것이다.

만약 내가 암과 같은 치명적인 질병에 걸린다면 공학도 또는 디자이너의 관점에서 그 과정을 소상히 블로그 등에 기록해 두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대개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사회적으로 금기시된다는 이유로 어떻게 보면 흥미진진할 수도 있는 인생의 마지막 장(final chapter)이 기록되지 않고 그저 사라진다는 것이 아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의 가족과 주치의는 이런 기록을 반기지 않겠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의미있는 기여가 되지 않을까 싶다. Buckminster Fuller만큼의 완성도 높은 기록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흥미로운 이정표를 남기는 방법이 될 것이라고 미리 기대해 본다.

참고:

– Richard Buckminster Fuller, Guinea Pig B

– 알고 보니 Aza Raskin 도 천재끼가 다분하다. 그의 블로그 Aza on DesignJef Raskin의 맥킨토시 초기 개발 기록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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