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밭에서

소향이 MBC 나는 가수다 2에 출연, 정훈희의 “꽃밭에서”를 불렀다.

그녀가 부른 “꽃밭에서”를 들으면서 “원래 이 곡은 이렇게 부르짖듯 목놓아 불러야 하는 곡이었나?”하는 의문이 생겼다. 소향은 무슨 노래를 불러도 자신의 표현력을 십분 발휘해 고음으로 힘있게 부르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과연 이 노래에 그런 애절함이 본래부터 담겨 있던 것인가 하는 점이 궁금해진 것. 정훈희가 1970년대 초에 발표한 노래 “꽃밭에서”(이봉조 작곡, 이종택 작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꽃밭에 앉아서 꽃잎을 보네 고운빛은 어디에서 났을까 아름다운 꽃이여

제목도 동요 “꽃밭에서”와 같은 제목인데다가 부드러운 멜로디도 부르는 이의 순수한 마음을 나타내는 듯하다. 뿐만 아니라 노래 주인공이 이런 탐구심을 가지고 자연을 관찰하는 태도가 분자생물학자이자 저술가인 후쿠오카 신이치를 떠올리게 해서 나로서는 반갑기 그지 없다.

그러나 이어지는 가사에서 의외의 상황이 전개된다.

이렇게 좋은날에 이렇게 좋은날에 그님이 오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왜 자연을 관찰하다가 갑자기 “그님”이 등장하는 것인가? 이건 마치 페니실린을 발견한 세균학자 알렉산더 플레밍이 푸른 곰팡이가 핀 배양접시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저녁 식사로 뭘 먹을까로 생각이 비약하는 것 같은–물론 가상의 이야기다–엉뚱한 상황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연애 감정이 있다면 꽃잎을 보다가도, 하늘을 보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뭘 하더라도 갑작스럽게 “그님”이 충분히 떠오를 수 있는 법.

그렇게 생각하다 문득 떠오른 노래는 현철의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앉으나 서나 당신생각 앉으나 서나 당신생각 떠오르는 당신모습 피할길이 없어라”

연애 감정이 한창 진행 중일 때는 이렇게 상대방에 대한 생각이 피할길 없이 떠오르기 마련인 거다. 그런데 이어지는 다음 가사가 의미심장하다.

가지말라고 애원했건만 못본체 떠나버린너 소리쳐 불러도 아무소용이 없어라

이 가사 내용으로 보건대 현철의 노래에서 말하는 바는 그저 일반적인 연애 감정에서 비롯된 애틋한 동경심이 아니라 이미 단절된 관계에 대한 애절하고도 한맺힌 그리움이었던 것. 즉, “피할길 없이 떠오르는 당신생각”은 희망과 가능성이 담긴 따뜻함이 아니라 패배감과 좌절감이 스며있는, 처절한 슬픔의 감정이다.

그러니 KDB대우증권에서 유머 넘치게 만든 광고에서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을 차용해 고객을 향한 관심과 배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한 것은 원곡의 의미와는 상당히 괴리가 있다.

그렇다면 다시 “꽃밭에서”가 노래하는 그리움의 감정은 이렇게 좋은 날 어쩌면 그님이 오실 수도 있다는 기대감을 내포한 그리움일까 아니면 그님이 오실 가능성은 전혀 없기에 꽃잎을 바라보며 아쉬운 마음을 표현하는 것일까? 그것이 어느 쪽인지는 본래의 의도가 어떠하든 부르는 이의 마음에 달려있다라고 매듭지으면 되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조수미가 부른 “꽃밭에서”(2015 앨범 그.리.다. 수록)의 후렴구는 비교적 잔잔하게 불리워진다.


* 참고 : 노래 “꽃밭에서”의 가사는 조선시대 선비 언보(彦甫) 최한경(崔漢卿)의 책 반중일기(泮中日記)에 수록된 한시 화원(花園)을 번역한 것이라는 상당히 그럴싸한 이야기가 인터넷에 나돌고 있고 최인호의 시집 “꽃밭”에도 그 이야기가 적혀 있다 한다. 그러나 그 출처가 되는 원전 반중일기(泮中日記)의 존재 자체가 불확실하다는 문제가 있다고 정재철 님이 EBS 장학퀴즈 자유게시판에 올린 글에서 지적하고 있다. 온라인 상에 여기 저기 실려 있는 해당 한시도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 이 노래에 맞추기 위해 고어적 표현을 동원한 한시를 지어내 그럴싸한 이야기를 각색해 냈다고 보기에도 무리가 있다. 만약 최한경이란 조선 시대의 인물이 이 시를 지었다는 것이 진실이라고 한다면 이를 입증해 줄 원전을 찾을 수 없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꽃밭에서”의 작사자로 알려진 이종택 님이 뭔가 단서를 제공해 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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