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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e] 파트리크 쥐스킨트, 『깊이에의 강요』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깊이에의 강요』에서 자신이 수많은 책을 실컷 읽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내용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음을 토로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조금만 시간이 흘러도 기억의 그림자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도대체 왜 글을 읽는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지금 들고 있는 것과 같은 책을 한 번 더 읽는단 말인가? 모든 것이 무로 와해되어 버린다면, 대관절 무엇 때문에 무슨 일인가를 한단 말인가? 어쨌든 언젠가는 죽는다면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일까? 나는 아름다운 작은 책자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 얻어맞은 사람처럼, 실컷 두드려 맞은 사람처럼 슬그머니 서가로 돌아가, 저자가 누구인지 모르고 그런 책이 있다는 것조차 잊혀진 채 꽂혀 있는 수없이 많은 다른 책들 사이에 내려놓는다.

—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김인순 옮김, 『깊이에의 강요』 (열린책들 1996) p84

책을 읽고도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것은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데에서 약간의 위로를 얻지만 어쨌든 마음 한켠이 허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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