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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이치, 관계 (1)

source unknown[/su_quote] 인정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지만 굳이 남의 입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으려고 애쓰는 것은 허무하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결국 남에게 인정 받게 되더라도 그래서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다는 뜻이겠지. 신약성경 마태복음 4장에 예수께서 40일간 금식하신 후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그 시험은 세 단계로 이뤄져있다.

  1.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2.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쳐서, 너의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할 것이다’ 하였다.
  3. 네가 나에게 엎드려서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
이 시험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앞의 두 경우는 결국 “너가 누구인지를 입증해 봐라(Prove yourself)”는 유혹으로, 그리고 세 번 째는 “이거 다 니 꺼 해라.(Claim for yourself.)”라는 유혹으로 볼 수 있겠다. 예수는 일관되게 자아를 입증하는 것보다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나타내는 구약 성경의 구절을 인용해 이 유혹을 이겨내신다. – – – 우리는 사회 생활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입증하고 인정받기 위해 이런 저런 자잘한 장치들을 활용하고 싶을 때가 있다. ‘사회적으로 위축감을 느끼지 않으려면 적어도 이 정도의 차는 타야지’, ‘좀 있어 보이는 사람들과 어울려서 나도 그 정도는 된다는 사회적 인정을 받으려면 특정 취미 생활은 기본이지’, ‘내가 누군데 아무데나 앉을 수는 없고 당연히 상석에 앉아야 격에 맞지’ 등의 생각이 스며들 때가 있다. 심지어 그런 생각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남이 허세를 부리는 모습은 우스워 보이지만 자기 속에 그런 생각이 들 때 이를 물리치기란 쉽지 않다. 자신은 아무 기대 없이 가만히 있는데 남이 와서 인정해 줄 때가 근사한 것이지, 스스로 ‘나 좀 알아주쇼’하고 들이미는 모습은 썩 고상해 보이지 않음을 일러주는 말씀도 있다: [su_quote]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 누가복음 14:10[/su_quote] 팀 켈러의 저서 “The Freedom of Self-Forgetfulness“에서 C. S. Lewis를 인용해서 말하듯, 자기 자신에 대해 조금이라도 덜 생각할수록 행복해 지는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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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b Application by Steve Jobs, 1973

리드 대학(Reed College)에 다니다가 경제적 형편상 중퇴했다. 리드 대학에서는 이 유명 인사와의 인연을 기념하는 페이지를 학교 홈페이지에 마련해 두었는데 그 내용을 읽다가 알게 된 흥미로운 이야기를 소개한다. (링크: Steve Jobs and Reed) 스티브 잡스는 1972년에 학교를 중퇴한 이후 일년 반 정도를 캠퍼스 주변에 머물면서 서체학, 무용, 셰익스피어 등의 강의를 청강했다. 그는 1973년 경에 어딘가에 취업 신청서를 냈는데 신기하게도 그 문서가 살아남아서 2018년 3월 경에 이뤄진 경매에서 우리 돈으로 약 2억원에 살짝 못 미치는 금액에 낙찰되었다. (링크: Steve Jobs 1973 job application sells for over $173K (CNET)) 리드 대학에서 발행하는 소식지에 이 취업 신청서에 관한 글이 실렸는데 (링크: Chris Lydgate, Why I Love This Epic Fail by Steve Jobs), 당시 18살 정도였던 스티브 잡스의 취업 신청서가 얼마나 엉터리였는지를 지적하고 있다. 명목상으로 스티브 잡스는 영문학 전공이었지만, 신청서에 대충 휘갈겨 쓴 내용에는 철자 오류 투성이였다. 하지만 이 기사의 저자는 결국 인생이란 누구나 이처럼 미완성의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면서 교훈을 찾아낸다. 스티브 잡스의 예로 보자면, 지금 당장 인생의 갈피를 찾지 못한다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리라는 법은 없는 것이구나 싶다. 기껏 입학한 학교를 졸업하지 못해도, 취업 신청서를 엉망으로 써내도, 그 사람의 인생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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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rning Opportunities

죽음(Death)”이란 제목의 한 학기 강의의 첫 수업 모습은 아래와 같다:

그러니까 스티브 잡스처럼, 오레곤주 포트랜드시에 있는 리드 대학(Reed College)에서 서체학(Calligraphy) 강의를 청강한 스티브 잡스처럼 애써 해당 도시에 가서 강의실을 찾아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다. 물론 모든 대학이 이런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도 아니고, 공개 강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학도 일부 강좌만을 온라인 상에 공개하는 것이지만, 지금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미국 대학의 강의실이 어떤 분위기인지를 알아볼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상당히 편리하게 된 셈이다. 학교마다 명칭이 다른데, 예컨대 예일대는 Open Yale Courses, 매서츄세츠공대(MIT)의 경우는 MIT Open Courseware로 불린다. 여러 학교의 수업을 묶어서 제공하는 공개 강좌 포털로는 edXcoursera.com 이 있다. 일부 강좌는 유료로 제공되는 듯하다. 그리고 초중고 수준의 무료 강의는 Khan Academy가 대표적이다. (예: SQL 기초) 배우려는 의지가 있다면 기회는 꽤 널려 있다. – – – 참고 목록: Yale: Freshman Organic Chemistry I Yale: Financial Markets (2011) Yale: Fundamentals of Physics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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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 summer rain

머잖아 워드프레스 블로그 시스템의 에디터가 “구텐베르크“라는 명칭의 새로운 방식으로 바뀐다고 해서 기다리는 중인데 아직 안정화되어가는 과정인 듯. 어쨌거나 고해상도 사진 이미지를 full-width로 손쉽게 올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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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딜레마

1. 투명 망토

학생 시절, 나는 “공부한다”고 하면 가정 내 대소사를 포함한 대부분의 의무와 책임로부터 면제되곤 했다. 공부가 일종의 면책특권(immunity)인 셈. 이것은 여러 가정에서 입시라는 맥락 하에 잠정적으로 허용되곤 하는 암묵적 규칙이다.

이런 면책특권이 청소년에게 주는 의미는 꽤나 강력한 것이어서, 공부를 일종의 핑계로 사용할 수 있음을 알게 되면서 이를 남용하는 경우가 종종 생겨난다. 마치 영화 『해리 포터』에서 나오는 투명 망토(Invisibility Cloak)처럼, 무언가로부터 도피하고 싶을 때 “공부한다”는 것을 자신을 감추는 수단으로 활용한다.

그러나 공부와 연관된 면책특권은 한시적인 것이기에 수험생 신분을 벗어나는 순간 그 효과는 사라진다. 이제는 공부는 공부대로 하면서 집안 일도 해야 하는데 학생 본인이 그 특권이 사라졌다는 현실을 깨닫지 못한 채, “도서관 가요”, “학원 다녀올께요” 등의 시효가 지난 주문을 계속 외치면서 자신은 자유롭다고 생각한다면 우스운 꼴이 된다. 아무래도 내가 아직도 그런 착각을 벗어나지 못한 게 아닐까 살짝 염려된다.

2. 보육 시설 혹은 도피처

여름 방학을 맞아 일주일의 대부분을 아침부터 늦은 시간까지 학원에서 보내는 학생들을 종종 본다. 원래 방학이란 배움으로부터 풀려나는 것인데 이런 일이 생기는 이유는 입시를 몇 년을 앞두고 있더라도 미리 준비해야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관점에서 학생들을 장기적 수험생으로 간주하기 때문인 듯.

한편, 일부 부모 입장에서는 한껏 까탈스러워진 사춘기 자녀들과 마주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학원이라는 보육시설(day care center)에 아이들을 맡겨 놓는 것일 수도 있겠다. 특히 더운 날씨에 집에서 아이들과 부딪히며 충돌하려면 얼마나 짜증나겠는가. 그래서 “공부를 시킨다”는 핑계로 (간혹 꼴보기 싫은) 십대 아이들을 매일 상당 시간 동안 보지 않아도 되는 합법적인 수단으로 학원을 활용하는 것.

다른 한편, 나름대로 공부한다고 수고하는 학생들이 있는 반면, 일부 학생들은 학원과 독서실을 부모의 간섭을 피할 수 있는 도피처(asylum)로 활용하고 있을 것 같다는 게 나의 추측이다. 어쨌거나 공부를 핑계로 부모와 자녀가 서로를 멀리하게 되는 것 같다.

3. 서로에게 가까이 가는 공부

이런 관점에서 보면 어떤 이들에게는 공부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두기 위한 수단이 되어 버린다. “배워서 남주는” 이타적 공부가 되려면 사람과 가까워져야 할텐데 공부를 하는 과정 자체가 사람을 멀리하는 연습이 된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실제로, 옆사람과 벽을 쌓아두고 자기 만의 공부에 집중하도록 만들어진 독서실 환경은 입학 혹은 자격 시험에서 남을 제치고 합격을 해야 하는 경쟁적인 구도에 적합한, 배타적 공부를 위한 환경이다. 긴 안목에서 공부라는 과정을 디자인한다면, 다른 사람, 특히 자신과 마음이 맞지 않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조금씩 가까워 질 수 있는 공부 과정을 설계함이 바람직하다. 떠들면 안 되는 도서관 대신 대화(dialog)와 토론(debate)이 가능한 공부 환경, 의무가 면제되는 도피처가 아니라 가정과 사회 내에서의 책임을 수용하는 학습 공간, 경쟁과 밀쳐냄이 아니라 협동을 전제로 한 자격 시험 등을 디자인할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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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하우어워스, 한나의 아이

스탠리 하우어워스 지음, 윤종석 옮김, 『한나의 아이』(IVP 2017)를 읽기 시작했는데 책 앞부분부터 좀 난해한 인용문이 독자를 맞이한다.

개인의 이야기는 세계의 역사 안에 들어 있으며, 그 전체 이야기 안에서 다른 모든 이야기들이 제자리를 찾는다. 그 역사는 진리가 명백해지는 움직임, 이해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움직임이다.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각 단계마다 이해 가능성의 정도가 달라지는 이유도 알게 된다.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 『도덕적 탐구의 세 가지 경쟁 이론』)

— 스탠리 하우어워스 지음, 윤종석 옮김, 『한나의 아이』(IVP 2017) p13

헉,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가 없다. 혹시 원문을 찾아보면 이해에 도움이 될까 싶어 원서를 참조해 보았다.

The story of oneself is embedded in the history of the world, an overall narrative within which all other narratives find their place. That history is a movement toward the truth becoming manifest, a movement toward intelligibility. But in the course of discovering the intelligibility of the order of things, we also discover why at different stages greater of lesser degrees of intelligibility remain. (Aladair MacIntyre, Three Rival Versions of Moral Enquiry)

원문도 난해하기는 마찬가지다. 어쨌거나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의역을 시도해 보았다:

세계의 역사는 개개인의 사연의 작은 조각들로 이뤄져 있다. 세계의 역사라는 것은 다른 모든 제각각의 이야기들로 구성된 하나의 커다란 이야기인 셈이다. 그리고 그 역사는 마침내 진리가 확연히 드러나는 순간을 향해 움직여 간다. 다시 말해, “아 그런 것이었구나”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는 방향으로 움직여 간다는 말이다. 한편, 우리는 세상의 이치를 조금씩 파악해가는 동시에, 살아가면서 도무지 이해 안 되는 크고 작은 일들이 존재하는 이유도 조금씩 알아가게 된다.

역시나 쉽지 않다.

뒤에 이어지는 본문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원문 자체도 난해하다. 내가 이 책의 번역을 맡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 그런 배경으로 볼 때, 번역자 윤종석님이 상당히 잘 해내셨다는 생각이 든다. 번역문을 읽고 이해가 어렵다면 원문 자체가 난해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세상에는 어떻게 번역해도 뜻이 통하는 그런 성격의 글이 있다. 문장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뜻이 비교적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경험하고 느낄만한 내용이기 때문에 그 사상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아주 다양하게 존재한다는 의미다.

반면, 이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글의 경우, 보통 사람들이 누구나 평소에 생각할 수 있는 방식과는 달리 저자 고유의 독특한 사상을 표현하는 정교한 글이기 때문에 본래의 뜻을 우리말로 옮겨 표현하는 방법은 상대적으로 매우 제한되어 있다. 그래서 번역에 상당한 정밀도가 요구된다.

그래서 이 책의 원문과 번역문을 같이 읽으면 번역 훈련에 꽤 도움이 될 것 같지만 일단 다른 책부터 읽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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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e] 파트리크 쥐스킨트, 『깊이에의 강요』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깊이에의 강요』에서 자신이 수많은 책을 실컷 읽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내용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음을 토로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조금만 시간이 흘러도 기억의 그림자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도대체 왜 글을 읽는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지금 들고 있는 것과 같은 책을 한 번 더 읽는단 말인가? 모든 것이 무로 와해되어 버린다면, 대관절 무엇 때문에 무슨 일인가를 한단 말인가? 어쨌든 언젠가는 죽는다면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일까? 나는 아름다운 작은 책자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 얻어맞은 사람처럼, 실컷 두드려 맞은 사람처럼 슬그머니 서가로 돌아가, 저자가 누구인지 모르고 그런 책이 있다는 것조차 잊혀진 채 꽂혀 있는 수없이 많은 다른 책들 사이에 내려놓는다.

—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김인순 옮김, 『깊이에의 강요』 (열린책들 1996) p84

책을 읽고도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것은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데에서 약간의 위로를 얻지만 어쨌든 마음 한켠이 허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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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owers, gleaned from a wedding

“If God gives such attention to the appearance of wildflowers—most of which are never even seen—don’t you think he’ll attend to you, take pride in you, do his best for you? What I’m trying to do here is to get you to relax, to not be so preoccupied with getting, so you can respond to God’s giving. People who don’t know God and the way he works fuss over these things, but you know both God and how he works. Steep your life in God-reality, God-initiative, God-provisions. Don’t worry about missing out. You’ll find all your everyday human concerns will be met.”

Matthew 6:30-33 (MS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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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e: Rudy Francisco, Helium

Helium is quite a page turner.

[…]My hobbies include: editing my life story,
hiding behind metaphors,
and trying to convince my shadow
that I’m someone worth following.
I don’t know much,
but I do know this:
Heaven is full of music,
and God listens to my heartbeat
on his iPod. It reminds him
that we still got work to do.

— a partial quote from Rudy Francisco’s poem “My Honest Poem” in his book Helium (Button Poetry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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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 지음, 동의보감 –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고미숙 지음 『동의보감 –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북드라망 2013)를 읽게 되었는데 저자의 시원시원한 글쓰기 덕분에 아주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특히, 일찍 돌아가신 저의 할아버지께서 대구에서 한의사로 활동하실 때 낮에는 일하시고 밤에는 잠을 줄여가며 동의보감을 공부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는 했는데 이제서야 저의 할아버지께서 어떤 내용을 공부하셨던 것인지를 살짝이나마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 무척 기쁩니다.

허준이 집필한 『동의보감』은 당시에 알려진 많은 의서를 참조하여 독자적인 분류방식으로 정보를 디자인하여 펴낸 뛰어난 저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동의보감』에는 다른 고전 의서를 인용한 글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 내용을 읽다보면 아주 오래 전에 중국과 한반도에서 활동한 의원들도 질병을 대할 때 꽤나 합리적 접근을 취해 왔을 뿐 아니라, 남을 치료하는 자로서의 마음가짐도 현대의 의사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컨대 중국의 손진인(손사막, 581-682)의 저서 『천금요방(千金要方)』의 대의정성론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고 합니다.

무릇 대의가 병을 치료함에는 반드시 정신을 편안하게 하고 뜻을 안정시키며 하고자 하는 것도 없고 갈구하는 것도 없이 하여 먼저 크게 자비롭고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먼저 발하고 중생들의 고통을 널리 구할 것을 맹세해야 한다.

— 고미숙 지음 『동의보감 –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북드라망 2013),p55

이 내용은 약 100여년 전에 활동한 뛰어난 의학자인 윌리엄 오슬러(William Osler)가 강조한 평정심(aequanimitas)과 실질적으로 동일한 내용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 읽고 있는 고미숙의 『동의보감』을 읽고 난 후에는 윌리엄 오슬러에 관한 책을 읽고 싶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