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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지 않는 디자인 기획 의도: 과잉설계

1995년 3월 20일, 일본 도쿄에서 옴진리교에 의한 독가스 테러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일 사고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대형병원인 성누가국제병원에는 전체 피해자의 1/10 정도인 640명 가량의 응급환자가 몰렸는데 약 2시간 동안 그 사람들을 전원 수용하고 적절한 치료를 제공했습니다.

한꺼번에 몰린 수많은 응급환자를 이 병원이 어떻게 그토록 신속하게 수용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여러 나라의 의료기관에서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 배경에는 병원이 신축 공사를 할 때 남다른 관점을 가진 이들에 의해 기획된 과잉설계가 있었습니다. 병원의 신축 건물이 세워지던 1992년 전후,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재난 상황에서 더 많은 환자를 수용하기 위해 복도, 대기실, 심지어 구내 채플에까지 산소 공급 파이프, 흡입용 진공연결 파이프 등을 설치해 어디든 병실로 전환할 수 있도록 설계를 했던 것입니다.

이런 기획을 주도했던 당시 병원장 히노하라 시게아키 씨는 폭격 상황에서도 환자를 치료할 수 있도록 지하에 수술실을 마련하고 벽에 주요 파이프를 설치한 스웨덴과 스위스의 의료시설에서 이런 점을 배웠다고 술회했습니다. (참고: 日野原 重明, だから医学は面白い, p86-87) 이런 과잉설계의 덕을 불과 3년만에 보게 될 줄은 몰랐겠지요. 그리고 히노하라 시게아키 씨가 자신의 저서에서 이런 배경을 밝히지 않았더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큰 병원이니까 원래 그 정도는 하는 거 아냐?”하고 별다른 생각없이 넘어갔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물론 과잉설계 자체는 상당히 어려운 주제입니다. 과잉설계에 들어간 비용은 일종의 보험료 같은 거지만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낭비로 비춰지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과거의 방식을 아무 생각 없이 답습하면서 틀에 박힌 디자인을 하는 것보다는 구체적인 기준을 세우고 과잉설계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하는 편이 더욱 큰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과잉설계를 하든, 아니면 과잉설계를 하지 않기로 결정을 하든 그 의도를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공유하는 것이 모두에게 유익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야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사람들이 더 생각하게 되고, 혹시 판단을 그르쳤다는 결론이 나는 경우에도 잘못을 바로 잡기에도 좋고, 그만큼 공부가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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